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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Nov 18. 2022

삐삐가 있다면 2

-219

하는 업무 때문에 TTS, 그러니까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서비스를 종종 이용하곤 한다. 그리고 그 퀄리티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흔히 상상하는 기계적인 음성이 아니라, 대부분의 구간에서는 정말로 사람이 읽어주는 것처럼 말투며 흐름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정말로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 캐릭터와 음성으로 대화할 수 있는 시스템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제 일 때문에 한 TTS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가족의 목소리로 AI 보이스를 만들어드린다는 광고 배너를 보고 나도 모르게 클릭해 내용을 읽어보았다. 말 그대로였다. 정해진 문장 몇 개를 읽은 녹음파일과 사연을 보내주면 100명 정도를 추첨해 가족의 목소리로 가동되는 AI 보이스를 제작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꿈에서 점지받은 로또 번호를 미처 사지 못하고 토요일이 지나갔는데 그 번호가 1등에 당첨된 걸 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서비스는, 왜 지금에야 나왔을까.


사람은 목소리부터 잊혀진다는 그 다분히 충격적인 문장을 읽고 나서, 나는 의식적으로 그의 목소리를 떠올려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의 여러 가지 목소리를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러나 인풋이 없는 아웃풋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그런 건 감히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나 혼자서만 갖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 대한 기억은 얼마나 변질되지 않고 보존될 것인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가버리면 그지없이 슬퍼진다. 어쩌면 미래의 나는 실제 그의 목소리와는 꽤나 판이하게 다른 목소리를 그의 목소리라고 믿은 채 붙들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왜 이런 서비스는 조금 더 일찍 나오지 않았을까. 내내 그런 원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생각도 한다. 어느 짓궂은 신이 있어 내 이런 투덜거림을 듣고, 좋다 시간을 1년 후로 미뤄줄 테니 실컷 만들어보렴 하는 자비를 베푼다고 해서 앞날에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미욱한 우리가 저 서비스를 사용해 그의 목소리를 남겨놓았을까. 살갑고 다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경상도 남자였던 그에게 정해진 문장 열한 개를 녹음하는 일을 내가 과연 시킬 수 있었을까. 쑥스럽고 머쓱함을 견디지 못해 이런 건 뭐하러 하려고 하느냐고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치지 않았을까. 나 또한 몇 번 졸라보다가 싫으면 말고 하는 투로 그냥 말아버리지 않았을까. 앞날의 일을 모르는 우리라면 필경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역시나, 내게는 그의 목소리를 간직할 수 있는 기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삐삐가 있었어야 했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러서 음성을 듣고, 저장은 1번 삭제는 2번을 누르는 그 삐삐 말이다. 뭐든 그렇지만 아날로그가 최고다. 편지도 엽서도 아닌 삐삐가 무슨 아날로그냐고 하면, 거기에 대답할 말은 좀 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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