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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Nov 23. 2022

신은 모든 걸 다 주시지 않는다

-224

월드컵을 핑계 삼아, 나는 근 반년 이상 담을 쌓고 지내던 공중파 방송과 슬그머니 화해 중이다. 물론 아직도 보고 있는 것은 월드컵 중계와 경기 분석 프로그램들 등 지극히 일부뿐이다.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이태원 참사와 몇몇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뉴스들은 듣기만 해도 몸 어딘가가 날카로운 칼로 푹푹 찔리는 기분이어서 아직은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본다.


어제 경기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단연 아르헨티나였고 그중에서도 메시였다. 축구 좀 좋아한다는 사람 치고 메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고 그 또한 그랬다. 진짜 난 놈이야. 그렇게밖엔 설명이 안 돼. 메시가 이렇게까지 뜨기 전, 청소년 대표를 하던 시절부터도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마 마라도나에 필적하는 물건이 될 거라고도. 그 말을 들은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축구 좀만 하는 애가 나오면 무조건 마라도나 후계자가 될 거라는 말부터 하지 않냐고, 근데 그렇게 된 애를 한 명도 못 본 것 같은데 하고 웃어넘겼다. 그러나 메시는 '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메시라는 이름은 축구라는 말과 어느 정도는 동치어가 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다 가진' 메시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월드컵과 인연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렇게까지 축구를 잘하면 두 번은 무리라도 한 번쯤은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어야 마땅한데, 그의 아르헨티나는 유독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신은 모든 걸 다 주지 않는다고 하잖아. 호날두한테는 다 준 대신에 메시도 같이 줬고, 메시한데는 다 준 대신에 월드컵 우승만 안 줬나 보다고 그는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랬었으니까, 아마도 그가 지금까지도 내 곁에 있어 이번 월드컵을 함께 보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메시가 월드컵을 우승하고 명예롭게 국가대표를 은퇴할 수 있을 것인지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어제 아르헨티나의 경기는 보기도 딱 좋은 저녁 일곱 시였다. 상대가 사우디아라비아라, 아르헨티나가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몇 골 차로 이기는지, 그중에 메시가 넣은 골은 몇 골인지 정도가 관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부한 말로 공은 둥글고, 어제 아르헨티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1대 2로 역전패했다. 오프사이드로 취소된 골이 세 골이나 된 와중에 이기는 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아르헨티나라도 힘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설추석에 친척들이랑 점당 10원을 걸고 고스톱을 쳐도 세 번 설사를 하면 그 판은 난 걸로 쳐주는데 오프사이드로 한 골도 아니고 세 골이나 날려먹고 어떻게 이기겠어. 결국 그대로 경기가 끝나버린 후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야, 너 이번에도 쉽지 않겠다. 그런 말도 함께.


그와 함께 본 첫 월드컵은 98년도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그게 벌써 대충 세어서 25년 전쯤의 일이다. 그때의 나는, 그와 함께 볼 수 있는 월드컵이 고작 다섯 번밖에 남지 않았고 여섯 번째의 월드컵은 나 혼자 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신은 모든 걸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 도대체 내게는 뭐 얼마나 값지고 좋은 일을 주시려는가. 오늘 밤 아홉 시에 있을 일본 경기 일정을 보다가, 나는 문득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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