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Nov 25. 2022

그런 일이 또 있을까요

-226

이번 월드컵 경기는 개막 첫날을 제외하고는 대개 저녁 일곱 시, 밤 열 시, 새벽 한 시와 네 시 등 네 타임에 한 경기씩이 진행되는 모양이다. 시차가 아예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이나 미대륙 쪽에서 열리는 월드컵이 거의 한나절 가까운 시차가 났던 걸 감안한다면 이 정도면 꽤 친절한 편이다. 실제로 어제의 우리나라 첫 경기도 밤 열 시라는,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까지를 고려한 매우 좋은 시간대에 잡혔고.


다섯 시쯤이 되면(실은 그 한참 전부터) 각 방송사들은 부지런히 전날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방송하고 여섯 시 정도부터는 오늘 있을 경기를 예상하는 프리뷰 프로그램을 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중 한 방송사에서 2002년 월드컵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를 며칠에 걸쳐 방송하고 있어서 보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지 3년째가 되던 해였고,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아 본의 아니게 석 달 넘게 집에만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 나 하나 가서 먹고살 데가 없겠느냐는 철없는 호기가 있었다. 그러나 석 달 남짓 계속된 구직 실패로 나는 자존감이 처박힐 대로 처박힌 상태였고 무슨 말을 해도 뒤틀린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 나 때문에 당시의 그는 꽤 애를 먹었었다.


그런 상태였으므로 처음엔 월드컵도 시큰둥했다. 월드컵이라니, 그딴 게 누구 밥 먹여주느냐는 소리를 망설이지도 않고 했다. 그런 나를 위해서, 그는 폴란드 전이 열리던 날 치킨과 맥주를 사들고 내가 살던 원룸으로 찾아왔었다. 사실 그날 저녁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경기를 중계하지 않는 채널이 없었기 때문이다. 뻔하잖아. 또 90분 내내 빌빌거리다가 간신히 무승부, 아니면 개박살나겠지. 우리나라 축구 맨날 그래 왔잖아. 그러나 그런 미운 소리를 한 내가 무색하게, 폴란드와의 첫 경기는 너무나 완벽했고, 깔끔했다. 후반전 유상철 선수의 쐐기골이 작렬하던 무렵 정도부터는 내가 더 흥분해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간 후 나는 밤새도록 인터넷에 올라온 대동소이한 첫 경기 리뷰 기사들을 읽고 또 읽으며 밤을 지샜다.


절정에 달했던 건 이탈리아 전 직후였다. 경기롤 보고 나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에서 뛰쳐나가 강남역으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생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목 좀 축이고 다리 좀 쉬러 들어간 호프집에서는 테이블을 다 벽 쪽으로 밀어버리고 만든 공간에 사람들이 몰려나와 서로서로 허리를 붙잡고 기차놀이하듯 춤을 췄다. 그때 흘러나오던 리키 마틴의 'she bamg'은 한동안 내가 아는 가장 신나는 노래였다. 그렇게 미쳐 날뛰던 한 달간의 기억이 차곡차곡 떠올랐다.


아, 그랬지. 그때 참 재밌었는데. 사람이 살다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고, 우리나라는 언젠가 다시 월드컵 4강에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큼 물색없이 즐거울까. 아마도 그해 그 여름은 다시는 오기 힘든 수만 가지의 우연이 맞아떨어져 만들어낸 기적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다큐멘터리 속에 출연한, 그 당시 나와 비슷한 나이였고 지금은 나와 비슷한 연배의 중년이 된 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으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 남은 날들 중에 그런 날이 또 있을까. 그가 내 곁에 있고 잠시 모든 것을 잊고 행복했던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아침에 이 글을 쓰다가, 나는 또 문득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한다. 그때 나이키에서 7만 원인지 꽤 거금을 주고 샀던 20번 홍명보 유니폼이 아직 집 안 어딘가에 있을 텐데 한번 찾아나 볼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눈치 좀 챙기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