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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06. 2022

첫눈이 온다구요

-237

어제 축구는 보지 못했다. 12시쯤 시작하는 남의 경기는 용까지 쓰면서 열심히 봐 놓고, 시작도 하기 전에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중간쯤 눈을 떠 보니 이미 튼 점수 차이로 지고 있었고, 나는 잠결에 더듬더듬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꺼버린 후 자던 잠을 마저 잤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야 알았다. 그래도 후반전에 한 골 정도는 따라갔다는 것과, 그가 떠나간 후 내가 텔레비전을 아예 꺼버리고 잠든 것은 어젯밤이 처음이었다는 것을.


어차피 모든 경쟁의 끝은 패배다. 마지막까지 승리하고 끝낼 수 있는 것은 1위, 혹은 우승자 단 한 명뿐이다. 그렇게나 자랑스러웠던 2002년 월드컵의 끝도 결국은 패배였다. 그래도 우리는 그 안에서라도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고, 석패나 분패, 혹은 졌잘싸 같은 말들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한겨울의 월드컵이라는, 또 언제나 보게 될지 기약 없는 이 희귀한 이벤트는 이제 나에게는 공식적인 막을 내렸고, 이제부터는 신나는 강 건너 불구경만이 잔뜩 남아있을 뿐이다. 남아있는 16강 경기부터는 정찬 후 먹는 맛있는 디저트쯤으로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보니.


야, 그건 그거고. 얼른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창문 너머로, 며칠 전 못 봤던 눈이 새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오늘 날씨가 체감상으로는 영하 15도까지 떨어지니 어쩌니 하더니 그 값을 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잠시,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다소 안 어울리는 철학적인 생각을 집어치우고 창가로 달려가 유리창에 최대한 얼굴을 붙이고 바깥을 내다봤다. 기상청의 공식 첫눈은 아니겠지만 내 맨눈으로 영접한 올해의 첫눈인 셈이다. 그가 떠나가고, 나 혼자 남은 이 세상에도 이렇게 첫눈이 내리는구나. 잠시 그런 회한에 젖어 나는 한동안 창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슬퍼하지 마세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하는 가사로 시작되는 옛날 노래라도 찾아 들어야겠다. 그 질박한 멜로디와 가사와, 가수의 목소리가 유독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당신도 어디선가 이 눈을 보고 있을까. 이렇게 첫눈이 오는데, 당신은 도대체 내 곁에 있어주지 않고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버린 것일까. 그런 생각에 마음이 울려,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이 모든 걸 다 두고 떠나는 걸음은 퍽 가볍더냐고, 조금은 화라도 내고 싶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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