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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07. 2022

있을 때 잘해주기

-238

동네 꽃집에서 살 수 있을 만한 어지간한 꽃들은 거의 한 번씩은 다 사다가 꽂아놓아 본 것 같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한 번 사봤던 꽃들도 텀이 좀 지났다 싶으면 다시 사다가 꽂아보고 있다. 확실히 그 몇 달 사이 꽃병을 관리하는 내 요령이 조금 늘어서, 처음보다 꽃들이 싱싱하게 오래 버텨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게 뭐든 내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퍽 즐거운 일이다.


앞전에 산 꽃은 오래가는 걸로는 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던 기억이 있는 스타티스였다. 앞전에는 여러 가지 색깔을 섞어서 사 왔었는데 이번에는 보라색으로만 한 다발 사다가 꽃았더니 꽤 그윽하게 분위기가 있었다.  스타티스는 그렇게 근 2주간을 잘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날씨 풀릴 때까지, 며칠만 더 수고해라. 매일 아침 꽃병의 물을 갈면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제 아침의 일이다. 또 한참이나 늦잠을 자고 일어나 꽃병을 손질하면서, 나는 2주를 넘긴 스타티스가 하나둘씩 말라서 처져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젠 그럴 때도 됐지, 생각하면서도 며칠만 더 버티자고 생각했다. 아니, 어제 내린 눈이 좀 녹을 하루 이틀만이라도. 1킬로쯤은 걸어가야 하는 꽃집까지의 길이 조금 편해질 때까지만이라도. 뭐 얼핏 보면 별로 티도 안 나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그러나 나는 결국 그의 책상에 말라가는 스타티스를 더 놓아두지 못하고, 아침 열 시가 조금 지난 시간 패딩과 목도리로 온몸을 둘둘 싸매고 꽃을 사러 집을 나섰다.


눈이 내린 길은 엉망진창이었다. 차와 사람이 지나다녀 적당히 다져지고 반들반들하게 짓눌러진 곳들이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어 빙판길이 되어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디디는 데만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래 가지고 꽃집까지 어떻게 가지. 그냥 돌아갈까. 그런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알 수 없는 오기가 불쑥 치밀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그 눈길을 1킬로나 걸어 꽃을 사러 갔다. 이럴 거면 눈이나 오기 전에 사 왔으면 좋잖아. 하여튼 소질도 없는 잔머리 굴리다가 늘 이런 식으로 외통수라니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그 고생을 하며 데려온 꽃은 리시안셔스다. 활짝 핀 꽃의 모양이 나비 같다고, 특별히 버터플라이 리시안셔스라고 부르는 종이라고 한다. 꽃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아주 얇은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만든 듯한 무늬도 들어가 있다. 꽃잎이 작고 수수한 스타티스와는 또 다르게, 활짝 핀 리시안셔스는 화려한 맛이 있어서 좋다. 요맘때 딱 어울리는 꽃이라고나 할까.


그가 있었더라면 어제 같은 날씨에 다른 것도 아닌 꽃 따위를 사러 1킬로나 걸어가는 짓을 분명히 말렸을 것이다. 나 또한 그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어제 같은 날씨에 눈길을 걸어 꽃을 사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뻘짓을 하지 말고 그가 내 옆에 있을 때 조금 더 잘해줬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책상을 지키고 있는 빨갛고 고운 꽃을 보면서, 나는 또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 있을 때 잘해주기, 떠난 뒤에 미련이 남지 않게. 구차하게 굴지 말기, 어쨌거나 사랑했던 기억으로. 이승환의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서 한 구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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