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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09. 2022

잘못 산 스키니진이 맞을 때쯤

-240

지난 초여름 무렵의 일이다. 급작스레 살이 너무 많이 빠져 통 맞는 옷이 없게 되었다. 상의야 오버핏이라고 우기면 된다지만 바지가 정말 답이 없었다. 단추며 지퍼를 풀지 않고도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갈 정도였으니까. 벨트를 해 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 걸 입고 밖에 나다닐 수가 없어서 급하게 몇 벌을 샀다.


회색이 나는 그레이 진을 한 벌 사려고 했는데 영 엉뚱한 물건 하나가 배송돼 왔다. 색깔은 그지없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 바지는 나보다 최소한 열 살 이상은 어린 사람들이나 입을 법한 소위 스키니진이었다. 평생 한 번도 날씬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런 옷이 어울릴만한 시절에도 이런 걸 입고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을 쳐다보는 기분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 바지를 쏘아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 스키니진을 반품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저거 맞을 때까지 살을 빼보자. 이런 객기가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품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도 하듯 바지에 달린 태그를 전부 떼어내고, 일단 한 번 다리에 끼워는 보았다. 그건 정말로, 입는다는 표현이 가당치 않아서 다리에 끼운다고나 해야 맞을 법한 행동이었다. 바지는 딱 내 무릎에서 한 뼘 위 정도까지 올라오더니 그 이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내 몸이 이렇구나.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바지를 곱게 개어 옷장 속에 넣어두었다.


오늘 아침 자고 일어난 침대를 정리하다가, 문득 그 바지 생각이 났다. 어떻게, 이젠 맞지까진 않더라도 입어는 질까.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체기가 제대로 온 내 체중은 근 한 달 내내 500그램 내외를 미친 듯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전 무릎 위 한 뼘 정도 올라오던 바지는 이제 거뜬하게 허리까지 올라왔다. 물론 거기까지가 다다. 단추도 잠글 수 없고 지퍼도 잠기지 않는다. 허벅지며 종아리가 너무나 딱 맞아서 이런 걸 입고는 가만히 서 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동작도 할 수 없을 성싶다. 그러나 그 몇 달 사이에, 내 몸은 어떻게든 그 정도까지는 변한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나 또한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쯤 그 스키니진을 입어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아마 어쩌면 마지가 무릎에서 허리까지 올라오는 시간보다 단추가 잠기고 지퍼가 잠기기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 옷을 입고 바깥에 나가는 게 민망하지 않게 되기까지에는 또 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내가 나를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그때쯤엔 바라만 봐도 가슴이 시리는 이 텅 빈 마음도 조금은 잠잠해질까. 그런, 기약도 없는 의문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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