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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10. 2022

강 건너 불구경 2

-241

우리나라의 성적과는 별개로 월드컵은 반년 넘게 흘러간 지난 방송의 vod에만 갇혀 살고 있던 나를 어느 정도는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 함은 아직도 내가 실시간 방송을 온전히 보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의 나는 지나간 방송의 vod 대신 월드컵 하이라이트만 하루 종일 보고 있어서 이래서야 이미 본 vod를 보고 또 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 덕분에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텔레비전을 통해 듣게 되는 것은 조금 좋은 일이다. 간만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16강전이 끝나고 이틀을 쉰 후, 어제 8강전이 시작됐다. 11시 반 정도부터 시작된 중계방송을 틀어놓고 보고 있었지만, 역시나 우리나라 경기가 아닌 남의 나라 경기는 몰입도도 떨어지게 마련이고 요즘의 내 생활 패턴상 그걸 끝까지 다 보기는 힘들어서 결국 중간에 잠들어버렸다. 그러다가 새벽에 잠깐 잠에서 깼을 때, 나는 크로아티아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브라질을 물리치고 4강행 운운하는 캐스터의 중계 멘트를 듣고 상황을 파악했다. 아, 브라질 졌구나. 펠레 어떡하냐. 그런 생각을 잠깐 하다가, 선득한 새벽 공기에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 덮고는 자던 잠을 마저 잤다.


그리고 오늘 차림 여섯 시 반쯤 눈을 떴을 때.


난 아직도 중계방송이 끝나지 않은 것을 보고 기함을 했다. 뭐야. 얘네 아직 축구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두 번째 경기는 새벽 네 시에 시작하니까, 지금까지도 축구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은 최소한 연장전, 그게 아니라면 승부차기까지 갔다는 말이 된다. 아마 연장전 후반이 끝나기 얼마 전인 모양이었다. 양 팀 공히 아까운 골 찬스가 두어 번씩 지나가고, 그대로 경기는 종료되었다. 또 승부차기. 결과는 아르헨티나의 승리였다. 네덜란드 쟤네는 전에도 한번 아르헨티나한테 승부차기하다 져서 8강인지 16강인지에서 떨어진 적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메시는 이래서 준결승까지는 갈 모양이다. 나는 따뜻하게 온기가 밴 이불속에 마치 우화가 덜 끝난 애벌레처럼 웅크린 채 이불 밖으로 손목만 내밀어 리모컨을 딸깍대면서, 저 멀리 어딘가에서 피가 마르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축구 경기를 속 편하게 지켜봤다. 그 두 경기가 우리나라 경기였다면 나는 어젯밤 몇 번이나 비명을 지르고 혀를 차고 고함을 지르고 앓는 소리를 내었을까. 속 편하게 잠이라는 걸 잘 수 있기는 했을까.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건.


불이 나고, 놀라고 당황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그 와중에 뭔가가 활활 타오르고. 그런데 그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는 나에게 일어날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여기는 '강 건너'니까. 강이 아니라 길 건너거나 숲 건너라면 그 불이 언제 내게도 번져올지 모르니 속 편하게 구경 같은 건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는 '강 건너'다. 저 불이 내게로 번져올 일은 죽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저 일이 절대로 내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제를 담보한 남의 불행 구경은 그렇게나 재미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언젠가 이 길고 청승맞은 타래를 매일매일 쓰는 이유는 '강 건너 불' 노릇을 하기 위해서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것만이, 남보다 특별하지도 않고 잘나지도 않은 내가 이 지면을 빌어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병상의 레전드에게 우승컵을 바치지 못하게 된 브라질 선수들이나, 또다시 같은 팀에게 같은 방식으로 발목이 잡혀 준결승 무대를 밟아보지 못하게 된 오늘 새벽의 네덜란드 선수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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