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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12. 2022

스포일러를 밟는 맛

-243

언젠가부터 인터넷에 특히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스포일러에 대한 엄격한 반응에 몇 번 따끔한 맛을 보고 난 후인 것도 같다.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영화들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개봉한 지 10년도 넘은 영화에 대한 글에서까지 스포일러 자제해달라는 반응이 나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몇 번 하던 끝에, 그냥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스포일러를 신경 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약간 즐기는 편이다. 가장 마지막에 가서 등장하는 A는 사실 B였다는 식의 반전 하나만을 위해 꾸며진 이야기는 그 반전을 빼버리면 영 만듦새가 시원치 않아지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스포일러를 알고 봐도 재밌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 하나가 있다. 스포일러를 다 알고 영화나 소설을 보면 물론 마지막의 그 짜릿하게 뒤통수 맞는 맛은 반감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대신 다른 재미가 생긴다. 창작자가, 혹은 범인이 어떤 식으로 자신 외의 등장인물과 독자 혹은 관객을 속이기 위해 갖은 발악을 하는지가 생생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는 지독하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게도 되고 너 참 용쓴다 인생 쉽지 않지? 하며 헛웃음을 터트리게도 된다. 이 부분은 오히려 스포일러를 밟은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특식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스포일러의 정점 같은 것이야말로 다 끝난 스포츠의 재방송이 아닐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요즘 보고 있는 월드컵 하이라이트 혹은 재방송은 그야말로 스포일러를 밟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호불호 심하게 타는 만찬 같은 느낌이다. 경기의 결과와 흐름을 다 아는, 마치 전지전능한 하나님과도 같은 입장에서 나는 경기를 지켜보며 지금 나온 옐로카드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지금 교체되어 들어가는 선수가 나중에 무슨 짓을 하는지, 이 경기의 추가 시간은 몇 분이며 그중 몇 분이 지났을 때 동점골이 터지는지, 이 승부차기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하는 것들을 전부 훤하게 아는 상태에서 그 순간에 못 박힌 채 발을 구르고 안타까워하는 캐스터와 해설, 화면 속 선수들과 관중들의 반응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신이 아닌 한낱 인간에 불과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아는 신의 기분을 잠시 맛볼 수 있는 것은 그 다 흘러간 축구경기를 재방송하는 한두 시간 남짓 동안에 불과하다. 실제로 살아가야 하는 내 삶에 스포일러는 가능하지도 않고 가당하지도 않다. 가끔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건데요 하고 목이 터지게 물어보고 싶은 순간이 오지만 당연히 그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을 수 없다. 지나간 4월의 그날도 그렇다. 그 일을 스포일러 당했다면 나는 과연 살 수 있었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그 일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4월 8일까지 매일매일을 눈물과 한탄에 잠겨 살지 않았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인생에 스포일러가 없는 건 인간이 그 스포일러를 이겨내기에는 너무 나약한 존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 집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8강 경기를 재방송해주고 있다. 나는 이 경기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고, 모로코 선수들과 관중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일 뿐이다. 나는 내일모레 있을 준결승에서 모로코가 어떤 결과를 받아 들게 될지 모른다. 그냥 거기까지가 딱 좋기 때문일까. 아무리 스포일러를 밟아야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해도, 결국 반전은 반전으로서의 역할을 할 때 재미있는 법이니까. 우리 인생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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