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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13. 2022

달력을 사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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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이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잠잘 때 빼고는 거의 한 시도 떼어놓지 않고 손에 쥐고 다니는 핸드폰 안에 훌륭한 캘린더 앱이 있고 늘 들여다보는 컴퓨터의 우측 하단에서도 오늘이 며칠인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단골 가게나 쇼핑몰에서도 이맘때가 되면 사은품으로 탁상 달력 하나쯤은 나누어준다. 그런 마당에 굳이 벽걸이 달력이라는 게 꼭 있어야 하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사실 대답할 말은 궁색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으면 허전한 그 무언가. 내게 벽걸이 달력은 좀 그런 의미에 가깝다.


우리 집의 벽걸이 달력은 몇 년 전부터 한 일본 만화가가 그린 일러스트 캘린더로 고정되어 있다. 자식들을 다 키워 내보내고, 조그만 섬에서 노란 얼룩무늬 고양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할아버지의 소소한 일상을 그린 달력이다. 원래는 만화책이었는데 그림도 귀엽고 내용도 너무나 정감이 가서 집 앞 도서관에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빌려보다가, 몇 년 전부터 캘린더 상품이 정식 라이센스로 나오고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그 달력을 사다가 걸어놓고 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 달력을 사서 매 달의 일러스트를 구경하고, 올해 설은 며칠을 쉬는지 올해 추석은 또 며칠을 쉬는지, 5월 초 10월 초의 황금연휴 때는 며칠이나 쉴 수 있는지를 미리 들여다보고 환호성을 올리거나 실망하는 것이 그와 나의 연중행사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제 또 그 달력을 사야 할 시기가 돌아왔다.


그가 떠난 후 뭐든 그렇지만, 이제는 혼자 해야 한다. 그 달력을 주문하고, 받아 들고 1년 치 그림을 미리 구경하는 것도, 내년의 휴일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며 즐거워하고 실망하는 것도, 심지어 올해가 끝나는 그 순간 헌 달력을 떼어내고 그 새 달력을 걸어놓는 것까지도 이젠 나 혼자서 다 해야 한다.


사실 그렇다. 달력이라는 건, 딱히 필요하지는 않은 물건이다. 내게는 핸드폰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당장만 생각해도 탁상 달력을 얻을 만한 곳도 두어 곳 정도는 있으니까. 그와 함께 하던 그 모든 것들을 이젠 나 혼자 해야 한다는 씁쓸함이 견딜 수 없는 거라면 그냥 사지 않으면 그뿐이다. 어쩌면 그게 가장 깔끔한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올해도 그 달력을 사기로 한다. 혼자 그 달력을 받아서 그림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새해를 맞아 그 달력을 걸어놓는 것까지를 혼자 하게 될지라도. 그냥, 내가 살던 대로 살아가는 것을 그는 바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그냥, 이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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