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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16. 2022

차라리 이별이었다면

-247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와의 헤어짐이 이런 식이 아니라, 그냥 이별에 그쳤다면. 그래서 그가 내 곁이 아니라 해도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서 무사히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면. 지금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덜 슬플까 하고.


한때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닐 뿐 그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이 쓰리고 아픈 가슴은 지금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그런 건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나 원망스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그냥 곱게 떠나가기라도 하지, 이런 식으로 모질게 우리의 짧지 않았던 인연을 끝내버린 것에 대해서.


그러나 요즘 들어 가끔 생각한다. 그와의 끝이 지금과 같은 식이 아니라 '이별'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우리는 30년 가까이를 알고 지냈고 그중 20년 가까이를 같이 살았다. 그 사이에는 물론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일들이 다 일어났지만 그와 나는 어떻게든, 결혼이라는 법적인 장치를 빌리지 않고도 서로를 놓지 않고 지금껏 지내왔었다. 이렇게 질기고도 모진 인연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서 남이 되려면 어떤 종류의 충격 혹은 사건이 필요할까. 도저히 헤어져 남이 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는 우리가 헤어지는 일이 벌어졌을 리가 없고, 그런 일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와 나에게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마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못할 말을 하고, 못할 짓을 하고, 못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끝에 너덜너덜하게 남은 마음 한 자락만을 붙잡은 채 헤어져 남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나는 아름다운 이별이 있다는 말 같은 건 믿지 않는다. 이별은 언제 어떤 식으로 해도 너저분하고 아픈 것이며, 그걸 받아들이는 것까지가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이별의 순간이 왔을 때, 그와 나라고 별 볼 일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가끔 하게 된다. 어쩌면 지금쯤 우리는 그야말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먼발치에서라도 눈에 띄지 않도록 서로 몸을 사리며 살아가야 할 만큼 상처뿐인 사이로 전락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질긴 인연을 잘라내는 데는 그만큼 독한 처방이 필요한 법이므로.


그래서,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면 나는 새삼스레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사진을 바라보며 당신은 참 생각보다 욕심이 많아서, 끝까지 나를 가지고 가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은 내 인생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떠나가버린 그는 가지가 부러져버린 옹이처럼 내 마음 한 구석에 박힌 채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별한 거라면, 그래서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주고받은 사이라면 이를 갈고 치를 떨다가 언젠가 무뎌지는 날이 오겠지만 이런 식으로 떠나간 사람을 내가 과연 어떻게 지울 수 있다는 말인지. 어떤 식이든, 내게 남은 것은 지독한 슬픔인가 아니면 꼭 그만큼의 원망과 미움인가 하는 차이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혼자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렇게 떠나는 것이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랫동안, 아름답게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참 그 사람 답기는 하다. 이럴 거였으면 미리 귀띔이라도 좀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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