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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19. 2022

야구가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던 그해에

-250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였을 것이다. 야구 국가대표팀이 7전 7승 전승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것이. 내내 부진하다가 준결승 한일전에서 역전 홈런을 치고 손을 번쩍 들던 이승엽 선수의 모습과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겨놓고 포수가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퇴장당하는 바람에 가슴을 졸이던 기억 같은 것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에게서 '리오넬 메시'라는 축구선수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야구와 축구는 조금 관계가 묘하다. 한쪽이 잘 되면 한쪽은 침체된다. 한쪽이 성적이 잘 나오면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 올림픽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야구가 흥하는 만큼 축구는 아쉬웠다. 게다가 몇몇 선수들이 경기 전 다소 경솔한 발언을 하는 바람에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 먹지 않아도 될 욕까지 먹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은 축구에서 멀어졌다. 게다가 축구에는 월드컵이라는 '넘사벽' 급의 컨텐츠가 있어서 올림픽은 그보다는 조금 관심이 떨어졌던 이유도 있겠고.


그런 축구를, 그는 그래도 열심히 챙겨봤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했다. 이번에 아르헨티나에 미친놈이 하나 나왔어. 축구 잘해. 진짜 잘해. 조만간 물건이 될 것 같아. 그에게 주워듣는 귀동냥으로 몇몇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이름을 알고 있던 나는 시큰둥하게 그렇게 대답했다. 아르헨티나야 원래 축구 잘하는 애 많잖아. 그런데 결국 다 고만고만하게 끝나지 않았나. 그는 그 말에 글쎄 얘는 좀 다를 것 같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리고 몇 년 안에, 그는 정말로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소속 클럽에서 레전드급의 기록을 쌓아가는 동안, 그는 늘 국가대표팀에서 부진했다. 아르헨티나는 '그 메시'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번번이 월드컵에서 8강 아니면 준결승 목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천하의 메시도 안 되는 건 안되는구나. 그런 월드컵이 하나 둘 쌓여가며, 그도 나도 그렇게 말했었다. 하기야 클럽에서 잘해도 월드컵 가면 죽 쑤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니까 결국 메시도 그런 케이스인 모양이라고. 메시가 마라도나만큼 대단한 선수인가 하는 질문에는 꼭 사족처럼, 그런데 메시는 월드컵 우승을 못했잖아요 하는 말이 달린다. 그냥 딱 거기까지인가 보다. 그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메시는 결국 자신의 힘으로 그 의문을 종식시키고 하나의 답을 내놓았다.


크지 않은 체격에 퍽 앳돼 보이는 인상이던 그 역시 이젠 노장에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관록이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도 트로피를 손에 쥔 그는 어린애처럼 기뻐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피 한 방울 섞이기는커녕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남인데도 마치 내 일처럼 뿌듯했고, 흐뭇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뼉을 몇 번이고 쳤다. 잘했다. 고생했네. 그런 말을 하면서.


아침에 일어나 몇몇 군데 찾아본 인터넷에서는 숫제 '성불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 표현이 정확한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건 다 가졌으나 그것 하나만은 가지지 못한 사나이가 결국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 마지막 하나까지 쟁취하는 과정을 나는 오늘 새벽 나름 실시간으로 함께 달린 셈이니까. 옛날에 당신이 '물건'이 될 거라던 그 선수는 정말로 물건이 되어서, 기어이 월드컵 우승 트로피까지 차지했다. 먼 훗날 그를 만나면 떠들 수다거리 하나가 적립된 기분이다.


오늘까지는 결승전 재방송을 실컷 보겠고, 내일부터는 어떡하지. 일단 모르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한다. 16년 전 그때의 그 어린 선수가 30대 중반의 베테랑이 되고 팀의 주장이 되어서, 조국에 36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바친 이 시점에, 그런 것쯤은 조금 나중에 생각해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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