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Dec 18. 2022

눈 내리는 월드컵

-249

새벽 네 시에 열려 거의 본방을 보지 못한 준결승과는 달리 3, 4위전과 결승전은 열두 시에 열리는 모양이다. 결승전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데다 이젠 정말로 남의 집 잔치가 되어버린 덕분인지 중계도 채널 한 군데에서만 하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모든 월드컵의 3, 4위전을 다 봤던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로 지루한 공방전이 오가는 끝에 1 대 0 혹은 2 대 0 정도의 승부가 나는 결승전과는 달리 3, 4위전은 제법 많은 골이 터지는 화끈한 경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실제로 거의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있을 2002 월드컵에서의 우리나라와 튀르키예의 3, 4위전도 3 대 2라는 난타전이지 않았던지. 아마 한 경기에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있어서 섣불리 공격만 할 수 없는 결승전과는 달리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기분으로 양 팀이 전력으로 맞닥뜨리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단순히 내 생각만은 아닌 모양인 것이 어제 해설하신 분의 말로는 3, 4위전에서는 평균적으로 3.8골이 터진다고 한다.


16강전 이후의 모든 경기들은 다 한 발 떨어져서 보고 있긴 하다. 어제 경기도 물론 그랬다. 팀 전체로 놓고 보자면 어딘가 2002년의 우리나라 대표팀을 떠올리게 하는 모로코가 좋았지만 이번이 마지막 월드컵이 될 크로아티아의 모드리치를 생각하면 크로아티아가 이겼으면 싶기도 했다. 어느 쪽의 편도 아닌 중립 관전자의 좋은 점이란 이런 것이다. 이 팀이 이기면 이래서 좋고, 저 팀이 이기면 저래서 좋은.


어제 양 팀은 10분도 지나기 전에 한 골씩을 주고받았다. 그 후로도 두 팀은 '이기기 위해' 맹렬하게 노력했다. 그 기세로만 보면 준결승에서 진 팀들끼리의 순위 결정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결승골은 K 리그에서 뛴 적이 있다는 크로아티아의 오르시치에게서 터졌다. 그렇게, 크로아티아는 3위를 차지했고 이번 대회 최고의 신 스틸러였던 모로코는 4강으로 이번 대회를 마쳤다.


이제 오늘 밤에는 결승전이 열리고, 지난 한 달간 이래저래 골방에 처박혀 있던 나를 반쯤 세상으로 끄집어내 준 월드컵은 그렇게 끝난다. 그가 없이 나 혼자 지켜본 첫 월드컵이 눈 내리는 겨울에 열렸다는 사실은 어쩐지 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언젠가 안정을 찾고 지금의 내 생활에도 어떤 식으로든 적응하겠지만 어딘가 뒤틀리고 어긋난 채 허우적거리며 살아낸 올 한 해는 평생 내 기억 속에 낯선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월드컵 중계가 흘러나오던 지난 한 달처럼.


앞으로 또, 눈 오는 겨울에 월드컵이 열릴 일이 있을까. 적어도 당분간은 없지 않을까. 월드컵은 4년 후, 8년 후에도 또 열리겠지만 그 월드컵들은 아마 정상적으로 여름에 열릴 테고 그가 떠나간 올해의 월드컵은 그 생경한 창밖의 풍경과 함께 내 기억 속에 그렇게 남을 것 같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어느 옛 시인의 시구대로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설마 떠난 사람이 이런 것까지를 다 생각했을 리는 물론 없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