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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20. 2022

올해가 열흘 남았습니다

-251

우리나라 식의 초순 중순 하순 하는 식의 날짜 세는 방법은 참 묘하다. 정말 그 단위로 시간이 바뀌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아 올해 다 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20일이라는, 하순이라는 날짜가 그렇게 만든 것 같다.


해마다 이맘 때면 아이고 이제 또 한 살 더 먹는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했다. 한 것도 없는데 올해는 또 뭐한다고 이렇게 후딱 지나가는지, 내년엔 또 한 해 어떻게 살아낼 건지 하는 생각들에 뒤숭숭하고 심란했다. 그러나 올해는 사실 별로 그렇지는 않다. 내 시계는 아직도 4월 그 언저리, 잘 봐주어도 5월 정도까지밖에는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치 남의 흘러간 첫사랑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기분으로 열흘 남은 올해의 달력을 바라보고 있다.


4월에 그와 헤어진 일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덮쳐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나는 그 일의 후폭풍과 그 일 이후에 내가 떠안은 외로움과 상실감 따위와 싸우며 스스로를 지켜내느라 다른 것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올해가 열흘 남짓 남은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당장 이번 주 주말이 크리스마스겠지만 그야말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은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텔레비전의 방송에서 자꾸만 눈을 돌리게 되는 것과도 결국은 유사한 기제가 아닌가도 싶다. 세상의 흐름에서 한 발 밀려나 유리돼 버린 기분. 아주 높은 첨탑 같은 곳에 감금된 채 그 아래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기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는 기분. 그런데, 기를 쓰고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그런 기분.


남은 열흘 안에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이 일어나서, 내가 모든 걸 훌훌 털고 단박에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게 가능할 리도 없거니와 별로 그럴 수 있다 해도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남겨진 그의 기억들을 끌어안고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것 정도가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조차도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괜찮아져야 한다는 강박에 떠밀려 땡처리하듯 치워버리고 싶지는 않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 조금 더 이런 식으로 그의 기억 속에 잠겨 있고 싶다. 12월 31일이 가면 다음날은 32일, 그다음 날은 33일 하던 지나간 노래 가사처럼.


크리스마스 무렵 그를 만나러 봉안당에 갈 생각이었는데 연일 날씨는 춥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눈비마저 쏟아져서 구릉진 비탈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하는 봉안당에 어떻게 갈지가 살짝 걱정된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 되지 않더라도 그건 남아있는 내가 알아서 해야 할 몫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이젠 조금은 어른이 되어야 할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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