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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22. 2022

하루 전날의 팥죽

-253

지인이 전화를 주셨다. 내일이 동지라, 집에서 팥죽 끓일 정성은 없고 집 앞 죽집에서 한 그릇 사 가지고 집에 가는 중이라고 하셨다. 집이 좀 가까우면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그 말씀에 실감했다. 아, 이제 동지구나. 정말 올해가 다 갔구나 하고. 며칠 있으면 크리스마스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맘때가 동지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그도 나도 팥죽을 썩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해마다 동지가 되면 꼬박꼬박 팥죽을 사다 먹었다. 몇 년 전부터는 단아한 이미지로 유명한 한 여배우의 단골집이라는 유명한 팥죽집을 찾아서 경기도 양평까지 팥죽을 사러 갔다 오는 뻘짓을 하기도 했다. 맛으로 먹는 거냐 그냥 재수 없는 것들 떨어져 나가라고 먹는 거지. 남들 다 하는 건 그냥 묻어서 같이 하는 거야. 이거 한 그릇 사 먹자고 거기까지나 갔다 오다니 암만 봐도 뻘짓이라는 말을 할라치면 그는 늘 그런 식으로 대답했었다. 이제 그도 떠나고 없는 지금, 아마 나는 다시는 그 집 팥죽을 먹기 위해 양평까지 가는 수고를 하지 않겠지. 뭐든 다 그렇지만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맛있게 먹어둘 걸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 혼자 남겨진 지금, 굳이 팥죽 같은 걸 먹을 필요는 없다. 팥죽을 좋아해서 동지를 핑계로라도 먹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먹는 팥죽의 맛이 어떨지도 생각하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정 그냥 넘어가기가 섭섭하면 편의점에서, 한 5천 원 하는 레토르트 팥죽이나 한 그릇 사다 데워 먹던지. 집에서 1킬로쯤 걸어가면 죽집이 있지만 이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길바닥을 걸어 거기까지 죽을 사러 갈 엄두는 솔직히 나지 않는다. 정 뭣하면 내일 한 그릇 배달시켜서 먹던지. 그러나 아마 내일은 죽집이 나름 대목을 맞는 날일 것이고, 이렇게 눈이 온 중에 날씨까지 추워진다니 아마 점심때쯤 배달을 시키면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은 기다리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팥죽을 좋아하는 분들은 오히려 식은 팥죽이야말로 별미라고들 하시던데 나는 그런 경지까지는 다다르지 못해서, 이 추운 날씨에 팥죽이 다 식어서 배달돼 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빈정이 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어제 오후 늦게 집 근처 죽집에서 팥죽 한 그릇을 시켰다. 죽은 딱 30분 만에, 당장 먹어도 될 정도로 따뜻한 상태로 배달돼 왔다. 나는 그 죽을 잘 식혀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점심을 먹고 출출해지는 오후 서너 시 정도에 한번 끓여서 먹을 생각이다. 이렇게 하면 기다릴 필요도 없고, 식어버린 팥죽에 빈정이 상할 일도 없고, 우리가 늘 사다 먹던 양평 그 팥죽집의 죽맛에야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편의점에서 사다 먹는 팥죽보다야 나을 테니 지금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 어닐까. 그가 아마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소질 없는 잔머리 굴리느라 엄청 고생했네, 하고 기특하다는 듯 웃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그는 없고, 이젠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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