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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27. 2022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258

카타르 월드컵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19일 새벽에, 메시와 아르헨티나의 우승이라는 결과물을 남기고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의 텔레비전 채널 또한 갈 곳을 잃었다. 2, 3일간은 중계권료 값을 하려는지 열심히 재방송해주는 몇몇 재미있었던 경기들, 우리나라 경기들, 골 모음, 메시 하이라이트 등등을 보면서 지나갔다. 그러나 사나흘쯤이 지나니 그나마도 슬금슬금 찾기가 힘들어졌다. 사실 끝난 지 얼마 안 된 스포츠 경기의 재방송만큼 영양가 없는 컨텐츠도 드물 것이다. 월드컵이 떠난 자리는 나로서는 봐도 전혀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몇몇 종목들로 채워졌고 나는 이쯤에서 정말로 채널을 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그러나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씹어야 삼킬 수 있는 음식을 거부하는 환자의 위장처럼 내 정신상태는 아직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공중파의 실시간 프로그램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어제부터 나는 그냥 몇 년간 잠시 끊었던 EPL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변한 것도 있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늘 순위표 꼭대기에 자리를 깔고 앉아 우승경쟁을 하는 몇몇 팀의 면면은 그대로였고 우승까진 바라보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중위권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몇몇 터줏대감들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새로 승격한 것 같은 이름이 낯선 팀들도 있었다. 가장 놀란 건 몇 년 전 한참 EPL을 볼 때까지만 해도 선수로 뛰고 있었던 사람이 어엿한 한 팀의 사령탑 노릇을 하고 있는 점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가긴 흘러갔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우리나라 방송사 중계의 1차 목표일 수밖에 없는 토트넘에는 손흥민과 해리 케인이 있다.


조국을 대표해 나간 월드컵 8강전에서 주어진 페널티킥을 실축한 주전 공격수. 생각만 해도 참 아찔한 기분이 든다. 만일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과연 몸져눕거나 어딘가로 도망쳐서 숨어버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지난 월드컵에서 해리 케인은 바로 그런 일을 겪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불과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그래도 클럽 유니폼을 입고 클럽에 복귀해 언제나처럼 전방을 누비고 있었다. 케인뿐만이 아니었다. 월드컵에서 팀의 승리에 환호하고 팀의 패배에 눈물흘리던 많은 선수들이 불과 1, 2주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을 딛고 일상으로 돌아와 묵묵히 자신의 맡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그가 제일 좋아했던 축구 선수는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였다. 그는 94년 월드컵 때 이탈리아를 이끌고 결승전까지 올라갔지만 승부차기까지 간 결승전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와 골키퍼에게 막힌 정도가 아니라 하늘로 뜨는 실축을 해버리고, 결국 우승은 브라질에게 돌아간다.(그 많고 많은 축구 잘하는 사람 중에 하필 그런 사람을 좋아하다니,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거라는 걸 그때쯤에 눈치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글자로만 읽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런 일을 겪고도, 그는 한동안 더 프로무대에서 활동했고 이탈리아 축구협회에서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혹은 8강전에서 실축을 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 인생이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그렇게 또 생각해 본다. 가슴이 아픈 건 아프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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