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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28. 2022

어제 난리가 났었다는데

-259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공군 비행장이 있다. 그리고 나는 두어 달쯤 전에 소음보상비 명목으로 20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을 입금받은 적이 있다. 그 돈은 귀를 찢는 듯한 소음 때문에 창문 두 겹을 다 닫고 살아야만 했던 날들에 비하면 어림없는 금액이라 그냥 피식 웃고 말았었다.


그런 곳에서 10년을 넘게 살아서, 어지간한 소음에는 이골이 나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제저녁 무렵 난리가 났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내 할 짓을 다 하고 늘 잠자리에 들던 그 시간쯤 누웠고, 태평하게 EPL 리뷰 프로그램 재방송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서야 어제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항적 때문에 공군 전투기들이 발진하는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여기저기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머쓱해하는 중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둔한 인간이었던가.


아침에 몇 군데 가 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러다 정말 전쟁이라도 나는 거 아니냐는 걱정 섞인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글들을 보다가, 나는 매우 얼척없는 생각을 했다. 나면 나는 거지. 그리고 스스로가 한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가끔 위태한 순간을 경험한다. 사이가 살짝 벌어져 저러다 또 우당탕 떨어지지 않을까 싶은 블라인드의 키움새 부분을 다시 끼워 놓으려고 의자를 밟고 올라갔다가 갑자기 머리가 팽 돌아 휘청거리는 순간이라든가, 요즘 날씨가 추워 그런지 샤워를 하고 나면 저녁까지도 물이 잘 마르지 않는 욕실에 대충 들어갔다가 미끄러운 타일 바닥을 잘못 디뎌 미끄러질 뻔하는 순간이라든가, 어설프게 뭔가를 해 먹으려고 칼질을 하다가 칼을 떨어뜨리고 기겁을 해서 발을 피한 순간이라든가. 예전 같으면 그가 달려와 어떻게든 해 주었을 일상의 위태로운 순간들은, 이젠 그래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내 곁에 불쑥불쑥 나타나 놀랬지? 하고는 사라진다. 그리고 가끔 나는 그런 순간들에 큰일 날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보다 그 일이 정말로 벌어졌을 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를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랄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 집 안에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그냥 그렇게 혼자 죽어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도 뭐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까지를 하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몇 번 흔들고 정신을 차린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지, 하는 말과 함께.


하루에도 몇 번씩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끔은 입을 열어 내 귀에 들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보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 자신을 다잡아야 하는 건, 역설적으로 내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애착이 놀랄 만큼 흐려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내게 주어진 숙제는 다 마치고 그를 만나러 가도 가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조퇴하듯 뛰쳐나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는 아마 그 성격에 절대로 내게 좋은 말을 하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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