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Jan 06. 2023

난 아직 모르잖아요

-268

우리 집에서는 여름이 지나고 공기가 선선해질 무렵이 되면 가습기를 튼다. 별로 비싸고 좋은 가습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나마 틀고 나니 아침에 일어나 코 속이나 입 속의 점막이 찢어질 듯 아픈 것이라든지 일어나면 몹시 목이 마르다든지 손 끝이 갈라진다든지 하는 증세에는 확연한 개선이 있어서, 집에 습도에 민감한 아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계속 그렇게 지내오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날씨가 추워서 창문을 잘 열지 않고, 그런 와중에 가습기를 튼 탓인지 집안 여기저기 결로가 생긴 것이다. 결로는 대개 곰팡이로 이어진다. 겨울을 한 달가량 지나는 동안 집안 여기저기에 거뭇거뭇한 곰팡이가 생겼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못 본 척했다. 난 원래 그런 걸 잘하니까. 그러나 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져서 인터넷에 손품을 팔아 가성비가 좋다는 곰팡이 제거제를 한 세트 주문했다. 택배강국인 우리나라답게 오늘 안에 배송이 온다는 모양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침대 정리를 하면서 어디 어디를 닦아내야 할지를 미리 눈으로 체크해 두었다. 침대 헤드장 뒤편이 제일 심각해서 미리 이불도 걷어놓고 침대도 용을 써서 앞으로 조금 끌어당겨 놓았다. 이제 택배가 오면 닦아내고 원위치를 시켜놓기만 하면 된다. 뭐든지 시작이 반이랬다. 벌써 일을 다 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다만 한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게 있다. 겨울이 되면 여름만큼 창문을 자주, 오래 열지 않는 건 올해만 그랬던 건 아니다. 겨울에 문을 꽁꽁 닫아놓고 가습기를 튼 것도 올해만 그랬던 게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집안 곳곳에 결로가 생겨서 곰팡이 제거제씩이나 사다가 닦아야 할 마음을 먹을 정도의 일이, 그간의 겨울에는 한 번도 생긴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그의 성격에 곰팡이 제거제를 미리 사다 구비해 놓았을 것이고 그게 집안 어딘가에 남아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걸로 봐서, 이건 내 기억이 요망을 부리는 과거 미화가 아니라 팩트다. 그럼 왜, 작년까지는 없던 일이 올해 들어 갑자기 생긴 것일까. 작년까지는 돼 있던 단열공사가 올해 들어 갑자기 없어졌을 리는 없고, 작년까지는 겨울에 환기 안 하고 가습기를 틀면 결로가 생긴다는 자연현상이 우리 집만 벗어나다가 올해부터는 다시 적용 대상이 됐을 리도 없는데. 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나 모르게, 내가 신경 안 쓰는 곳에서 그가 바지런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 덕분에 우리 집에는 결로가 생기지 않았던 거고, 그가 그 부분을 인수인계해주지 않은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밖에는 아무래도 생각하기가 어렵다.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가 제자리를 벗어난 덕분에 침실은 몹시 뒤숭숭해 보인다. 보고 있는 나조차도 뒤숭숭한 기분이다. 거뭇거뭇한 곰팡이 자국은 못 본 척할 때는 있는 줄도 모르겠더니 한 번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자 도대체 그간 이러고 어떻게 살았나 싶은 생각에 한숨이 난다. 오늘에야 또 작심하고 한 번 닦는다지만 한 번 이런 난리를 피우는 걸로 될 일인가 하는 걱정도 슬그머니 든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안 생기려면 도대체 뭘 어떡해야 되는 거냐고 애꿎은 그의 사진 액자에 대고 두 번 세 번 묻는다.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런 나만 남겨놓고 혼자 도망가서, 거기서 밤에 잠은 잘 오냐고. 괜히 그런 투정과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그런 브런치 아닙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