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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09. 2023

어느 새벽의 재난문자

-271

어제저녁쯤이었나, 뜻없이 흘러가던 텔레비전에서 너무나 익숙한 그림체의 애니메이션을 본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응? 저게 왜? 나는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추 30년 전쯤, 그와 내가 일요일에 학교 앞 만화방에서 전권을 빌려 빈 강의실 하나를 점거하고 키득거리며 읽던 만화가 이번에 새로 극장판이 나왔다는 모양이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인터넷 몇 군데를 찾아보니 별로 어렵지도 않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만화의 극장판 이야기가 여기저기 올라와 있는 걸 찾을 수 있었다. 더 큰 충격은 알고 보니 엄마가, 아빠가 이 만화의 팬이더라는 어린 친구들의 글들이 굉장히 많이 올라와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는 것, 그 사이 모든 것이 이렇게나 많이 변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는 사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버린 세탁기 속의 빨래처럼 뭉뚱그려져 사정없이 정신을 때렸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어제 제법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아 그래도 좀 자야겠지 하고 취침등을 끄고 가물가물 막 잠이 들려는 찰나.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막 들려던 잠에서 깨 들여다본 핸드폰에는 지진 운운 하는 살벌한 문구가 들어와 있었다. 실제였는지 착각이었는지 침대가 조금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다. 인천. 진도 4.0. 그런 단어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나는 다시 핸드폰은 끄고 누웠다. 그러나 한번 깨버린 잠은 아예 더 먼 곳으로 달아나버린 것 같았다.


사실 전 국민의 이벤트라 할 수 있는 수능을 연기하게 만든 포항 지진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그전부터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소소한 지진은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에 꽤나 둔한 나조차도 뚜렷하게 느낄 정도의 진동이 꽤나 수 초간이나 계속된 적이 있었다. 진짜 무섭다. 우리 집 이거 내진 설계는 돼 있을까. 퍽이나 돼 있겠다. 요즘 짓는 집들도 돼 있을지 안 돼 있을지 모르는 판국에. 그런 대화를 하다가, 그는 짐짓 엄숙하게, 그렇게 말했었다. 걱정 말라고. 지진이 나서 우리 집이 다 무너져도, 내가 너 하나는 무조건 살릴 거라고. 그렇게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무슨 남자가 그러냐고. 이제 지진 나서 우리 집 다 무너지면 나는 누가 살려주는데. 갑자기 그렇게까지 생각이 내달려버려서, 나는 이제 그냥 이 세상엔 나 혼자 뿐이구나 하는 때늦은 자각에 어제 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지진이 나서 우리 집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겁 많고 동작 굼뜬 나는 도대체 누가 살려주는 거냐고. 슬램덩크가 돌아왔고 바람의 검심도 돌아온다는데 왜 당신만 떠나고 없는 거냐고. 꿈에라도 만나면 좀 따지고 싶은데, 꿈에조차 한 번 다녀가지 않는다. 저런 말이 듣기 싫어서 안 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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