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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10. 2023

가습기의 딜레마

-272

지난주 한바탕 난리를 치면서 집안의 곰팡이들을 싹 닦아낸 후로 나는 가습기를 틀지 않고 있다. 하루 정도는 틀었었다. 틀어 놓고도 마치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마냥 안절부절못하고 계속 창틀을 들여다 보고 블라인드 뒤편의 유리창을 손끝으로 더듬어보곤 했다. 자기 전까지는 뭐 그럭저럭 세이프 범위였는데,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창틀에 또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는 걸 보고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역시 가습기가 문제인가 싶어 한 사나흘 가습기를 전혀 틀지 않아 봤다. 그랬더니 결로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 역시 가습기가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튼 날은 거의 하루 종일 틀어놓다시피 하던 예전에 비해 저녁부터 아침 정도까지, 절반 정도만 틀었는데도.


가습기가 문제라면 가습기를 안 틀면 된다는 식의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문제는 가습기를 안 틀고부터는 눈이 따갑고 입과 코 속의 점막이 건조하고 목이 자꾸 마른 증상이 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알레르기성 비염이 좀 있는데 이 증상이 또 습도에 나름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내가 불편한 것뿐이라면 어떻게든 참아 보겠지만 안 그래도 요즘 익숙하지 않은 겨울을 넘기느라 고생하고 있는 우리 집 화분들과 그의 책상에 꽂아놓은 꽃들에게 이 건조함이 과연 괜찮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가습기 때문에 결로가 생기니 그냥 안 틀면 된다는 속 편한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 참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다.


이런 문제를 나만 겪을 리는 없다 싶어 인터넷에 몇 군데 검색을 해 봤다. 아니나 다를까 비슷한 증상으로 골머리를 앓고 계시는 분들이 적잖게 있었다. 결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단열 공사가 제대로 안 되어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벽을 다 뜯고 단열공사를 다시 하는 초강수를 두지 않는 이상은 답이 없다는 것이 대개의 결론이었다. 하루에 30분 이상씩은 꼭 환기를 하는 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밤에는 가습기를 틀고 낮에는 제습기를 튼다는 분들도 적잖게 있었다. 그게 뭐야. 그쯤에서는 그렇게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습기 같은 건 집에 없기도 하지만 가습기를 틀기 위해 제습기를 튼다니. 이거야말로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서 술을 마신다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주정뱅이 같은 상황이 아니냐고, 나는 한참이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결론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젠 뭐든지 다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데, 나는 이런 단순한 문제 하나도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는 이럴 때 어떻게 했었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나를 두고 그렇게 훌쩍 갈 마음이 어떻게 들었던 건지. 당신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모질고 독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의 사진 액자에 대고 눈을 흘긴다. 혼자만 그렇게 편하게 사니까 좋냐고, 뭐 그런 투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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