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Jan 11. 2023

상조라도 들까

-273

그가 질색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에 첫 번째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쯤에 해당하는 것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보험 및 상조광고였을 것이다. 썩 유쾌하지도 않은 내용을, 다른 광고의 몇 배나 되는 시간 내내 그 특유의 톤으로 읊어대는 해당 광고들을 그는 무슨 벌레라도 본 듯이 싫어했다. 음악방송 케이블 채널 같은 데서 그런 광고가 흘러나오면 이런 채널은 대개 어린애들이 보지 않냐며, 그러니까 지금 애들더러 용돈 털어서 지네 부모 상조라도 들어주라고 저따위 광고를 하는 거냐고 핏대까지 올리며 짜증을 내곤 했다. 덩달아 나 또한 그런 광고들을 무척이나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나는 텔레비전의 상조 광고를 무작정 돌려버리지 않고 한참이나 가만히 보고 있게 되었다.


이번 겨울, 눈 쌓인 길을 꾸역꾸역 걸어 올라가 그의 봉안당에 몇 번 다녀오면서 나는 무조건 그가 있는 자리를 수목장으로 바꿔야겠다던 당초의 생각을 조금 재고해 보게 되었다. 겨울엔 춥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아무리 갑갑한 걸 싫어하던 사람이라지만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 자리에 내 마음대로 그를 데려다 놓는 게 좋은 일일까. 차라리 지금 있는 실내 봉안당을, 하다 못해 부부단 같은 걸로 바꿔서 조금 넓은 데로 옮겨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에게도 언젠가 갈 곳은 필요하니까 지금 미리 장만해 둔다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납입 금액에 변동이 없다는 둥, 어느 어느 은행에서 지급 보증을 선다는 둥 하는 상조 광고의 내용들이 이젠 마냥 짜증스럽게만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일 모르는 건데, 지금 당장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와 같은 곳에 잠들 수라도 있을까. 유언장이라도 미리 써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 어디에 자리를 봐놓았으니 거기 안치해 달라고 해놔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물론 아직까지는 불쑥불쑥 드는 생각들일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벌써 내 이름 앞으로 상조에 들어 납입금을 붓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언젠가는 나도 정말로 그런 일들을 준비해야 할 나이가 될 테지.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지나간 봄이 나에게 남긴 길고 깊은 상처자국을 새삼 발견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만일의 일이 일어났을 때 그다음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진짜 혼자라는 사실도 함께.


그가 내게 한 가장 못할 짓은 벌써 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습기의 딜레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