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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26. 2023

눈이 오잖아

-288

한 며칠 아이고 춥다 하는 말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춥더니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니 온통 눈이 오고 있다. 가지가지한다, 하고 한 마디 하다가, 하기야 지금이 겨울이고 그중에서도 1월 하순이면 한참 이럴 때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머쓱하게 입을 다문다.


그와 나의 고향은 부산이다. 부산은 정말 웬만해서는 눈이 오지 않는다. 단순히 기온이 따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바다를 끼고 있는 영향인지 뭔지 몰라도, 다른 지방에 폭설이 내려 한바탕 난리가 나는 와중에도 부산에만은 눈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씩, 제대로 된 눈도 아니고 내려서 쌓이지도 않는 진눈깨비만 내려도 온 도시가 난리가 난다. 사람들의 기질적인 특성에다 도로 사정까지 겹쳐서 부산의 버스 기사들은 운전이 터프하기로 유명한데, 그런 눈 같지도 않은 눈이 조금 내린 날이면 그런 부산의 버스가 마치 빙판길에 처음 나선 어린애처럼 벌벌 기듯이 움직이는 게 워낙 웃겨서 그와 나는 타지로 떠나 온 후 몇 년 동안이나 그 이야기를 하며 웃곤 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렇다. 눈이 오면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밖으로 뛰쳐나가 그 위를 뛰고 구를 기력이 있던 시절에 그와 나는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부산에 살았었고 겨울이면 제법 소복하게 눈이 오는 윗동네로 이사 오고 난 후로는 그도 나도 귀찮음이 뭔지를 알아버려 눈은 그저 따뜻한 방 안에서 구경만 하는 게 최고더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는 것이다. 가끔 외출할 일이 있을 때 눈이 내리면 밤새 차의 보닛이며 차창 위에 쌓인 눈을 치우고 시원치 않은 배터리로 시동이나 빨리 걸리려나 하고 스트레스를 받느라 눈을 온전히 즐기지를 못했다. 이거야말로 아내는 남편의 시계줄을 사느라 머리칼을 잘라 팔았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핀을 사느라 시계를 팔아버렸다는 '크리스마스 선물'의 눈 버전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늘 문득 한다.


그와 함께 보낸 그 숱한 겨울 중에 이렇게 눈이 오는 날 한 번이라도 밖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든 눈싸움을 하든 해보지 못한 것이 오늘에서야 좀 안타깝다. 그랬더라면 오늘 같은 날 떠올릴 추억이 하나쯤은 더 있었을 텐데. 보일러가 윙윙 돌아가는 따뜻한 집 안에 앉아 아이고 눈 온다 오늘 군인 애들 고생하겠네 원래 눈 오면 좋아하는 건 애들이랑 개밖에 없다더라 운운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대화나 나눈 것이 고작이라서.


아니, 아니다. 그런 기억이 있었으면 오늘 같은 날 나는 또 백 퍼센트도 아닌 백오십 퍼센트쯤 창 밖을 쳐다보며 눈물을 짜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마 그런 것까지 다 미리 알아서 눈 오는 날 그런 추억 같은 건 일부러 만들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적국에 장가 들러 간 유비에게 비단주머니 세 개를 건네주며 위급할 때 풀어보라 했다는 제갈공명 같은 소린가 싶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눈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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