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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27. 2023

1+1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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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울적할 때 내가 쓰는 기분 전환하는 방법 중에는 인터넷을 뒤져 만원 남짓하는 생활용품을 '지르는' 것이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어지간해서 2만원을 넘지 않을 것, 사는 데 꼭 필요한 소모품이거나 있으면 유용한 물건일 것, 오프라인으로 사는 것보다 싸거나 양이 많을 것 등이 있다. 이렇게 두 세 건의 주문을 하고 나면 나름 돈 좀 쓴 것 같으면서도 사실 그렇게 큰 돈은 쓰지 않은 셈이고 그렇게 해서 산 물건들이 다 언젠가 어떻게든 쓰이는 물건이니 낭비라고는 할 수 없으며 택배를 기다리는 재미까지 생기니 나름 일석 삼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산 물건 중에 베개 커버가 있다.


딱히 살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뜻없이 들여다 본 핸드폰의 핫딜 알림에 배송비도 안 붙은 5천 원도 안 하는 가격에 50*70 사이즈의 베개 커버를 1+1로 판다는 문구가 떠올라 있는 걸 보는 순간 이게 필요한지 아닌지를 차치하고 일단은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나는 홀린 듯이 상품 페이지로 들어가 컬러 하나를 고르고 주문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상품을 받았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컬러가 내가 생각한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나는 매우 취향이 편협한 사람이라 내가 고르는 물건들은 대개 비슷한 색상의 스펙트럼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나 스스로도 그걸 알기 때문에 '집에 잔뜩 있는' 비슷비슷한 색깔(주로 회색과 베이지색, 연한 갈색, 아이보리 색 등의 범주다)의 베개 커버들 말고 좀 다른 색을 사보려고 나름 노력해서 고른 옵션이었는데 정작 온 베개 커버는 우리 집에 수태 있는 다른 베개 커버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색깔이었다. 이거 뭐, 내 의도를 파악한 눈이 자동으로 필터를 먹이기라도 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 어떻게, 반품이라도 하나? 또 그러자니 내키지가 않았다. 배송비도 없이 고작 5천 원에 두 장 산 베개 커버를 반품까지나 해서 다른 걸로 교환한다니. 이걸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귀차니즘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 됐어. 눈곱만큼 달라도 다른 색깔이겠지. 설마 백 퍼센트 똑같은 색깔이기야 하려고. 누구를 들으라는 말인지 그렇게 중얼거려놓고, 나는 그 베개 커버를 일단 이불장 속에 집어넣어 놓았다.


그리고 어제 아침, 침대를 정리하고 베개 커버를 바꾸면서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문제의 베개 커버를 꺼내 씌웠다.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처음 그 커버를 봤을 때 내가 인식한 색상은 연회색이었는데 어제 다른 커버들과 놓고 비교해 보니 연회색이라기보다는 연한 갈색에 가까웠다. 그 차이가 막 뚜렷한 정도는 아니지만 집에 있는 다른 커버들과는 분명히 다른 색깔이었다. 여러 사람 번거롭게 해 가며 굳이 반품 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렇게, 나는 어제 새로 산 커버를 씌운 베개를 배고 아주 푹 잘 잤다.


물론 이 베개 커버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이 커버가 아무라 예쁜 색상이었어도, 아무리 싸게 파는 물건이었어도, 1+1이 아니면 사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내 침대에는 아직도 그의 베개가 내 베개와 똑같은 커버가 씌여진 채 놓여 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꽤나 오래 그럴 것이다. 무엇을 사든 그의 것까지 함께 사던 그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와서 선뜻 나만을 위한 뭔가를 사는 것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게는 아직도, 1+1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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