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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Feb 20. 2023

이젠 옷장 정리를 시킬 차례

-313

혼자 남고부터 나는 좀 즉흥적으로 변했다. 아니 실은,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데 워낙에 꼼꼼하고 돌발로 뭔가를 하는 걸 싫어하던 그가 있는 덕분에 그간 그러고 살지 못한 것에 가깝다. 불쑥 뭔가가 먹고 싶어져서 기껏 짜놓은 식단을 갈아엎기도 하고 불쑥 나가고 싶어져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휑하니 나갔다 오기도 한다. 물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자잘한 후폭풍(식단이 꼬인다든가 일정이 틀어진다든가)까지 감당하는 것 또한 온전히 나의 몫이다.


어제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점심을 먹고 무료하게 앉아있다가 갑자기 불쑥 나가서 서점에나 좀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사야 할 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굳이 어제여아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갑자기 그렇게 꽂힌 것이다. 나는 서둘러 점심 먹은 설거지를 해놓고 나갔다 올 준비를 했다. 오늘은 뭘 입고 나가나. 몇 벌 있지도 않은 옷 중에 작년 봄에 샀던 그레이진을 꺼냈다. 이 바지는 그가 떠나고 체중이 급격하게 빠지기 시작해 전에 입던 바지들이 벨트를 해도 입고 다닐 수가 없을 만큼 커지는 바람에 다급하게 새로 샀던 옷이다.


물론 그때를 기준으로 해도 살이 좀 더 빠지긴 했기 때문에 웬만큼 클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내 몸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줄어 있었나 보다. 작년 봄에서 여름까지 굳이 벨트를 하지 않아도 잘만 입고 다니던 그 바지는 이제 무리를 하면 단주와 지퍼를 풀지 않아도 입었다 벗었다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벨트를 안 하고는 도저히 밖에 입고 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좀 어안이 벙벙했다. 근 몇 달째 통 몸무게가 줄지 않고 있어서 소위 말하는 '유지어터'의 상태로 진입했나 생각했는데, 숫자와는 다르게 내 몸은 그 사이에도 조금씩이나마 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산 지 1년도 안 된 옷이 벌써 이렇게 커지다니. 급하게 대충 샀던 것치고는 색깔이며 핏이 꽤 마음에 들던 바지여서 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식이면 이 바지도 얼마 못 입고 버려야 하려나. 그러고 보니 한참 살이 빠지기 시작해 하나 둘 새로 샀던 그 옷들도 다 이런 식으로 커진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언제 날 잡아서 좀 추려내야 하나.


그러다가 문득 아직도 우리 집 옷장 속에는 정리하지 못한 그의 옷들이 그대로 걸려있다는 걸 떠올린다. 그러는 거 아니라고, 이제 옷장이며 물건이며 정리하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고 있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전기세 적게 내라고 텔레비전을 바꾸게 만들고 눈 피로하지 말라고 컴퓨터 모니터를 바꾸게 만들고 겨울에 따뜻한 물 편하게 쓰라고 보일러까지 바꾸게 만든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이제 적당히 하고 옷장 정리를 하라는 뜻인가. 그러나 여기서는 다시 고개를 젓고 만다. 아직은 그럴 자신이 없다. 정말로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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