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델피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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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고작 두 번의 경험으로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튤립은 참 그 소담한 외모에 비해 대단히 성정이 장군 같은 꽃이어서 정말로 장렬하게 전사하는 그런 느낌이 있다. 다섯 송이를 사다 놓은 와중에 두 송이가 한나절만에 꽃잎이 확 피어서는 전사할 기미를 보이기에, 어제는 언제나 그랬듯 점심을 챙겨 먹고 꽃을 사러 나갔다. 꽃값은 조금 내렸냐는 질문에 사장님은 한동안은 아마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며 웃으셨다.


쇼케이스 안을 주루룩 둘러보다 보니 연한 파란색의 나비 날개 같은 꽃이 대번 눈에 꽂혔다. 몇 년 전 한 인기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이별 직전에 선물한 꽃으로 나와서 한동안 여기저기 입살을 탔던 그 꽃이다. 저거 델피늄인가요? 네, 델피늄 맞아요. 워낙에 청순하고 여리여리한 꽃이어서 아 예쁘다 하는 생각을 한참 했던 터라, 그래서 소셜 커머스 같은 곳에 특가 운운 하는 말이 붙어 올라오면 미친 척하고 한 번 사볼까 하는 생각을 몇 번 했던 꽃이라 오늘은 별 고민 없이 델피늄을 사기로 했다. 근데 이 꽃 조금 까다로워요. 생긴 것부터도 그렇지만 막 튼튼한 꽃은 아니거든요. 집안 건조하면 꽃잎부터 잘 말라서 시들고요. 신경 좀 써주셔야 오래 보실 거예요. 사장님은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 내심 꽃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조금 걱정을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빨리 시드는 꽃은 사람을 속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집에 갖다 꽂아놓은 델피늄은 창가로 드는 햇살을 받아 마치 날개가 파란 나비처럼 거기 그렇게 앉아있어서 오며 가며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긴 한다.


꽃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반갑지 않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미처 해결을 하지 못하고 저만치 미뤄두었던 일 하나가 기어이 이젠 슬슬 날 좀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고개를 들고 나서는 참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하루종일 우울했다. 오후쯤에는 사다 놓은 초콜릿을 무슨 팝콘 집어먹듯 순식간에 몇 개나 까먹었다. 이제는 그렇게 인상을 구긴 채 앉아있어도 너 왜 그러냐는 말 한마디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으니, 구겨진 내 기분은 내가 알아서 펼 수밖에 없다. 빨래를 널 때 두어 번 탁탁 펴서 널듯이.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창가에 놓여있는 델피늄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 글을 쓴다. 몇 년 전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결국 그래서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났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러기를.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그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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