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Jan 16. 2023

무사시보 벤케이의 튤립

-278

9개월 넘어 10개월 차, 서른 몇 번이나 꽃을 사면서 다른 건 모르겠고 오래갈 것 같은 꽃을 골라내는 감은 조금 생겼다고 생각한다. 꽃송이가 작고 꽃대가 가늘고 단단한 꽃들이 대개 오래가는 것 같다. 물론 그건 어쩌면 꽃이 시들어가는 기색이 내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뜻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사다 꽂은 석죽은 꽤나 오래갔다. 한가득 피어있던 꽃송이들 속으로 시들어 마르는 꽃들이 얼마 전부터 눈에 띄게 늘어나기에 사다 놓은 지 얼마나 됐나 하고 달력을 보니 연초도 아니고 작년 말에 사다 놓은 모양이었다. 아이고. 오버페이스했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지난 주초쯤 꽃집에 들러 새 꽃을 사 왔다. 사장님의 말로는 꽃집이 제일 대목일 때가 졸업과 입학이 겹치는 이맘때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꽃집의 쇼케이스 안에는 크고 화려한 꽃들이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잔뜩 들어 있었다. 웬만해서는 여러 종류의 꽃을 섞어서 사지 않는 편인데 그날 본 꽃들은 하나같이 다 너무 예쁘고 고와서 도저히 한 종류만 고를 수가 없었다. 케이스 앞에 붙어 서서 어쩔 줄을 모르는 나를 위해서 사장님은 내 주먹만 한, 커다란 봉오리가 맺힌 핑크색 장미 한 송이, 벨벳으로 만들었나 싶을 만큼 색깔이 고운 빨간 장미 한 송이, 하늘하늘 퍼진 꽃잎이 마치 소녀의 발레스커트 같은 라넌큘러스 한 송이, 가늘고 삐죽삐죽한 꽃잎이 시크해 보이는 거베라 한 송이, 껑충하게 키가 큰 연분홍 튤립 한 송이를 섞어 이렇게 가져가시라고 권해 주셨다. 여기다 안개만 좀 섞으면 그냥 꽃다발 스펙이라는 말씀과 함께.


아닌 게 아니라 한 송이 한 송이가 꽃다발의 센터를 맡을 것 같은 그 꽃들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확실히 작은 꽃송이가 조랑조랑 달린 꽃들에 비해 방 안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힘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꽃병에 물을 갈면서 나는 이번 꽃 정말 잘 사 왔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동안 송이가 큰 꽃들은 시들어가는 티가 너무 완연하게 나서 웬만하면 잘 사지 않았는데, 그게 그럴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걱정한 것에 비해 꽃들은 며칠이 지나도 금방 시들지 않고 꽤 오래 그 자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 점이 놀랍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제 아침, 나는 튤립의 꽃잎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슬슬 수명이 다 돼 가나 보다. 뭐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래도 하루 이틀 정도는 더 가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나는 밤 사이 튤립이 꽃병 속에 꼿꼿하게 선 채 꽃잎만 죄다 떨어지고 꽃대만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잠깐 멍해졌다.


그런 식으로 마지막을 맞는 꽃을, 나는 처음 봤다. 보통의 꽃은 꽃이 시들 정도가 되면 이미 줄기에서부터 죽어가는 기색을 느낄 수 있다. 대가 물러진다든가, 혹은 자른 단면이 굳어버려 물을 빨아들이지 못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튤립에게서는 그 어떤 기색도 느낄 수가 없었어서 나는 그 갑작스러운 최후 앞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시보 벤케이였던가. 주군이 적으로부터 몸을 피해 도망쳐 숨어 있는 절의 문 앞을 지키고 서서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다 맞고, 그 자리에 꼿꼿하게 버티고 선 채로 죽었다는 일본의 무사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소담하던 꽃잎을 전부 떨군 채 꽃대만 그 자리에 버티고 선 튤립은 비장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녀석, 화병에 꽂힌 꽃 주제에 사람한테 제 마지막을 그렇게나 보여주기 싫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도 그랬던 걸까. 마지막 모습 같은 건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날 새벽 나를 한 번 불러보지도 않고 그렇게 조용히 가버린 것일까. 튤립을 뺀 꽃병을 다시 그의 책상에 갖다 놓으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을 이야기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크림 리조토 한 번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