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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17. 2023

좀 대충 살려고 했는데

-279

살다 보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느슨해지고 적응해 간다. 비자발적 다이어트를 9개월 넘어 10개월 차에 접어든 내 소감이 그렇다. 처음엔 정말 이 나이 먹고 미스코리아라도 나갈 만큼 날씬해지는 거 아니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에게 말할 정도로 급속하게 살이 빠졌었는데, 이젠 몸이 바뀐 생활에 웬만큼 적응을 한 건지 한 두어 달째 아침마다 재 보는 체중계의 눈금은 치열하게 제자리걸음 중이다. 아니, 이 상황을 상황에 적응한 몸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요즘의 내 식습관이 처음에 비해 많이 느슨해지기도 했다. 요즘 나는 오후쯤이 되면 전에 없는 출출함에 시달려서 자꾸만 뭐라도 집어먹고 있다. 체중은 지극히 정직해서 먹으면 먹은 만큼 눈금이 올라가고 안 먹으면 안 먹은 만큼 눈금이 내려간다. 몸은 몸대로 적당히 살자고 아우성을 치고 있고 나는 나대로 적당히 그 성화에 타협한 결과물이 요즘의 내 체중인 것이다.


그래도 뭐, 여기서 유지만 해도 나쁘지는 않지 않나. 나름대로 그런 느슨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9개월 전에 비해 앞자리만 두 번을 바뀐 내 몸무게는, 아직도 '정상체중'의 범위에는 살짝 벗어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나쁘지는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이 나이에 아이돌 같은 게 될 것도 아닌데, 여기서 유지만 해도 훌륭하지. 암. 군것질이 당겨서 냉동피자 같은 걸 사다가 양껏 데워먹고 난 다음 날에도 1킬로까지 늘지는 않는 체중계의 눈금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내 자신을 합리화했다. 왜 살이 안 빠질까 하는 조바심에 우울해지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 쪽이 훨씬 건설적이지 않으냐는 핑계와 함께.


그러던 중에, 나는 어제 아침 집 앞에 박스 하나가 놓여져 있는 사진이 첨부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일전에 철관음을 보내주신 중국에 계신 지인 분이 연말쯤 뭘 좀 보냈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박스를 들고 들어와 뜯어보니 그 안에 든 것은 화려하게 수가 놓인 긴 스커트와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상의로 된, 우리나라로 치면 생활한복 같은 옷 한 벌이었다. 세상에나. 나는 한참이나 이 때아닌 선물 앞에 당황해 허둥거렸다.


이거 나한테 맞기는 할까. 나는 곱게 개어진 치마를 펼쳐 허리에 둘러보았다. 옷은 지나칠 만큼 딱 맞았다. 여기서 지나칠 만큼 딱 맞았다 함은 그 옷을 입은 채로 꼿꼿하게 서서 인형처럼 미소만 짓고 있어야 하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걷거나, 앉거나, 크게 숨을 쉬거나, 웃거나 하면 대번에 아 저 옷 저 사람한테 작구나 하는 티가 날 것 같은 그런 상태. 나는 옷을 벗어서 다시 원래대로 개어 옷장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지인 분에게 메시지를 보내 보내주신 선물은 너무 감사히 받았고, 선녀나 입을 법한 옷인데 제가 선녀가 아니라서 안타깝다는 감사 인사를 했다. 몇 달 후 날이 풀리면 그에게 인사를 하러 갈 때 꼭 입고 가겠다는 말씀도 드렸다. 옷이 저한테는 조금 작더라는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이로서 내 옷장 안에는 옷에 몸을 맞춰야만 할 옷이 예의 스키니진까지 두 벌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이어트도 대충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왕 시작한 거, '이만하면' 정도가 아니라 '날씬한' 정도까지 살을 빼보는 게 어떠냐고 그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다.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까 앞으로 그렇게 계속하면 뭐가 돼도 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오늘 받은 그 옷은, 분명히 입고 인사하러 오겠다고 했으니까 그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도.


뭐가 이렇게, 매사가 마음 같지 않다. 좀 적당히 대충 살려고 했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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