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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18. 2023

'별로인 꽃'은 없다

-280

어제는 그와 나만의 작은 기념일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이런저런 정리를 마치고 봉안당에 다녀왔다. 지난주는 날씨가 좀 푸근했었던 것 같은데, 그 한 며칠 반짝 날이 풀린 뒤라 그런지 그 이전 같은 매서운 추위는 아닌 것 같은데도 온몸이 벌벌 떨리고 마스크 속으로는 연방 내뱉은 숨이 습기가 되어 차올랐다. 사람은 참 이렇게나 간사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봉안당에 다녀오는 길에 나는 일부러 몇 정거장 앞에 내려 꽃집에 갔다. 장렬히 전사한 튤립의 예를 볼 때, 며칠 안에 꽃병의 꽃들이 차례차례 전사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날이 춥지 않으면야 며칠 더 미적대다가 꽃이 시들면 나가서 사 오면 되겠지만 아무래도 날이 추우니 나선 김에 사다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단골 꽃집에는 사장님이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남편이신 듯한 분이 가게를 보고 계셨다. 지금 꽃다발 같은 건 못 해드린다는 말을 먼저 꺼내시는 와중에 그냥 집에 꽂아놓을 것을 좀 사러 왔을 뿐이라고 말씀드렸다. 지난번 갔을 때는 너무 화려한 꽃들이 많아 정신이 없더니, 오늘은 구색도 많이 줄고 꽃들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졸업 시즌에 들어온 좋은 꽃들이 다 빠지고 남은 것들이라 그렇다는 것이 바깥사장님의 설명이었다. 꽃 파셔야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느냐고 내가 웃으며 묻자, 아니 그럼 뻔히 눈에 보이는 걸 아니라고 하느냐고 되묻고는 한참을 웃으셨다.


몇 가지 꽃들을 골라 보았지만 사장님은 그거 상태가 좋지 않아 며칠 못 갈 것 같다며 다 만류하시고는 아래쪽에 꽂혀 있는 카네이션들이 그래도 상태가 좋은 편이니 그중에서 골라 보라고 권해 주셨다. 그러나 그 카네이션들은 별로 내 눈에 차지 않았다. 크고 모양이 예쁜 것들은 색깔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흰 바탕에 진한 분홍빛의 테두리가 둘러진 좀 작은 것은 색깔은 마음에 들었지만 꽃송이가 좀 작아 왜소해 보였다. 아마 지금 사다 놓은 장미며 라넌큘러스 같은 꽃들이 워낙에 송이가 크고 실해서 그럴 것이다. 여기서 나는 역시나 사람은 참 간사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그렇게 한참을 미적거리다가, 나는 작은 송이 카네이션을 골라 한 단을 포장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손질해서 꽃병에 꽂아놓고 보니 영 어딘가 허전해 보였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색깔 좀 마음에 안 들어도 큰 꽃으로 사 올걸. 이래서야 좀 싱싱하다는 거 말고는 저번 꽃보다 너무 존재감이 없잖느냐고, 그렇게 한참을 투덜거리며 나는 카네이션을 그의 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래도 이번 꽃은 색깔이 특이하고 예쁘니까 그걸로 퉁치자는 사족을 덧붙여서. 그리고 오늘 아침. 여느 때처럼 꽃병의 물을 갈고 꽃대를 자르면서 다시 본 카네이션은 그지없이 예쁘기만 하다. 꽃송이가 작다지만 그건 앞에 샀던 장미 꽃송이가 너무 커서 그런 것이고, 딱 보기 좋은 적당한 꽃송이들이 소담하게 펼쳐진 것이 수수하면서도 화사한 매력이 있었다. 그 하룻밤 사이에 내 눈이 적응을 하기라도 한 것일까. 정말이지 다시 한번,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 모양이다.


아니. 그게 아니지. 그냥, 세상의 모든 꽃이 다 나름의 방법으로 예쁜 것이다 정도로 생각하고 싶다. 그걸 사람이 알아보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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