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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19. 2023

장미는 화려하게 피고

-281

지난번 사 왔던 튤립이 주군을 지키려는 무사처럼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최후를 맞고 난 후, 남은 꽃들은 꽃병째 내 자리로 옮겨졌다. 사실 늘 그런 식이다. 같이 사 왔다고 해도 꽃들의 수명은 다 같지 않고, 그중 몇 송이가 시들기 시작하는 징후를 보인다고 아직도 멀쩡한 다른 꽃들까지 같이 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쯤 되면 새 꽃을 사다가 그의 자리에 두고, 원래 있던 꽃들은 내 책상에 갖다 놓고 며칠을 더 감상하는 식이다. 그래서 뭐 덕분에, 내 책상에도 전에 없이 크고 화려한 꽃들이 며칠이나 자리를 지켜 주게 되었다.


지난번에 사 온 꽃들 중에 제일 신기했던 것은 꽃송이가 내 주먹만 한 커다란 분홍색 장미였다. 꽃송이가 어찌나 크고 탐스러운지 펼쳐진 꽃잎이 보이지 않는 뒤쪽에서 보면 꽃이 아니라 잘 익은 복숭아처럼도 보였다. 이렇게 큰 꽃이니 분명 한 사나흘 인에 시들시들해지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장미는 예상외로 오래갔다. 꽃대가 물러지거나 끝이 까맣게 변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꽃은 날마다 조금씩 더 벌어졌지만 그래도 그 장비는 꽤나 오랫동안 그 커다란 꽃송이를 꽃잎 한 장 떨구지 않고 잘 유지했다. 튤립이 다 떨어진 후로도 며칠이나 그랬다. 덕분에 나는 장미가 의외로 오래 못 가더라는 내 편견이 다분히 편견에 불과했거나 혹은 꽃을 보살피는 내 재주가 신통찮아서 그랬던 거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고 꽃병에 물을 갈아주기 위해 꽃들을 다 들어내 놓고 새 물을 받은 후, 꽃대 끝을 자르려고 장미를 집어드는 순간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그 풍성하게 달려있던 꽃잎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와르르 떨어졌다. 꽃이 워낙에 크다 보니 꽃잎들도 무척 컸고, 나는 졸지에 장미 꽃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40여 년 살면서 내가 본 모든 장미 중에 가장 크고 호사스러웠던 이번 장미는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똑같이 꽃병에 꽂힌 꽃이라도 마지막을 선택하는 방법이 이렇게나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모두가 잠든 밤에 조용히 꽃잎을 떨구고 마지막을 맞은 튤립과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손에서 마지막을 맞은 장미처럼. 마지막, 그 우수수 떨어지던 장미 꽃잎의 잔상이 화려할 만큼 아찔해서 잊혀질 것 같지가 않다. 그런 식으로라도 내게 기억되고 싶었던 것일까. 장미는 화려하게 피어 순결하게 진다는 오래된 만화의 주제곡 가사는 내가 알던 것 이상으로 진실이었던 모양이다.


나의 마지막은 어때야 할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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