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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15. 2023

크림 리조토 한 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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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뭣에든 까다롭지 않고 싫증을 잘 내지 않는 편이다. 이건 딱히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무엇에든 까탈을 부리기 시작하면 내가 피곤해지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그렇게 세팅된 성격인 것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그럼 매일매일 라면만 끓여 먹고 살 거냐며 매일 조금씩 다른 식단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는 그를 내심 유난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매일매일 라면만 먹고 살 때도 있고, 뭐 그런 거지. 뭐 저렇게까지 하나 하고.


그리고 그가 떠나고 혼자 남은 지 아홉 달이 지난 요즘, 지금에서야 나는 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한꺼번에 이틀 분의 밥을 해서, 첫날은 이렇게 저렇게 해서 먹는다 쳐도 두 번째 날의 식은 밥으로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한계가 뚜렷하다. 기껏해야 라면을 끓여서 말아먹거나 뭔가를 넣고 볶아서 먹거나 정도다. 이 짓을 이틀 걸러 한 번씩 하자니, 이제 겨우 아홉 달밖에 안 된 주제에 슬슬 물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가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나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었는데. 이게 다 당신이 나한테 이상한 걸 가르쳐놔서 그런 거라며, 나는 가끔 그의 사진에 대고 눈을 흘긴다.


그렇게, 식은 밥으로 해 먹을 수 있는 좀 다른 뭔가가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터득한 음식이 크림 리조또다.


레시피는 매우 간단하다. 양파와 표고버섯 정도를 채 썰어서 버터나 올리브유에 볶는다. 다 익어갈 때쯤엔 베이컨을 조금 넣는다. 생크림과 우유를 섞어 300 밀리쯤 붓고 끓이다가 식은 밥을 넣고 푹 끓이면 그걸로 끝이다. 몇 번 해 보다 보니 내 나름의 베리에이션도 생겨서 야채를 볶을 때 화이트 와인을 넣는다든가 치킨 스톡을 한 숟갈 넣는다거나 하는 짓도 해본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우유를 넣은 후 고춧가루를 한 두 숟갈 넣는데 이렇게 하면 나름 로제 소스 비슷한 맛이 나서 훨씬 덜 느끼하고 좋다. 마지막쯤엔 파마산 치즈 가루도 듬뿍 뿌리고, 그릇에 옮겨 담은 후엔 파슬리와 후추를 뿌린다. 이렇게 하면 꽤 그럴듯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이 크림 리조또는 내가 먹기엔 제법 괜찮은 수준인데, 이게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내가 워낙 음식 맛에 대해 허들이 낮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를 모르겠다. 이젠 물어볼 곳도 없으니, 그냥 어차피 내가 먹을 거 내 입에만 맛있으면 되지 하는 애매한 평가로 퉁치고 넘어가는 수밖에는 없다.


그가 있을 때, 매 끼니 그렇게 입 벌린 제비새끼처럼 그가 해주는 것들을 받아먹기만 하지 말고 가끔 이런 거라도 한 번씩 만들어서 같이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라면 맛있게 먹어줬을 텐데. 그리고 다음번에는 이걸 넣어보라든가, 저걸 저렇게 해보라든가 하는 조언도 해줬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식사 시간은 또 즐거웠을 텐데. 이 어설픈 크림 리조또를 한 번만 같이 먹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지금에서야 한다.


이 대수롭지 않은 크림 리조또 한 그릇을 만들면서도, 나는 그가 사다 놓은 화이트 와인과 치킨 스톡과 파마산 치즈와 파슬리를 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당신이 이걸 사다 놓지 않았으면 나는 이나마도 해 먹지 못하고 살고 있겠구나 하고. 당신은 떠났지만 당신은 아직도 내 옆에 살고 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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