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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14. 2023

무화과 잎이 지면 2

-276

언제나처럼 눈을 뜬 아침이었다. 비몽사몽간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고, 요즘 들어 추가된 루틴으로 또 결로가 생기진 않았는지 유리창과 창문을 한 번 더듬어보고, 바깥의 날씨에 대한 짤막한 품평을 하고, 늘 하던 대로 화분을 들어다 창가에 올려놓으려는 순간.


무화과 가장 꼭대기에 붙어있던 가장 커다란 잎사귀가 툭, 떨어졌다.


그 순간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잠시 아주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어린애처럼 화분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잠시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버퍼링이 걸려 버벅대다가 나는 간신히 화분을 창가에 내려놓고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 들었다. 어쩜, 지난봄에 처음 받았을 땐 그렇게 새파랗게 기세가 좋던 그 잎사귀는 초록색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노란색이 되어 있었다. 완전히 기능이 정지한 데다 심지어 이렇게 크기까지 하니, 이걸 꾸역꾸역 매달고 있는 것도 저 녀석에게는 보통 무리가 가는 일이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서, 힘이 부쳐서, 이쯤에서 놓아버리기로 한 모양이다.


무화과 잎이 변색돼 떨어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심지어 곁가지에 붙은 작은 이파리 두어 개는 내가 직접 떼어 준 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 떨어진 잎은 잎이라기보다는 사람으로 치면 얼굴이랄까, 그런 느낌이어서 좀체로 충격이 가시지를 않는다. 인터넷 온갖 곳을 찾아보고, 잎이 떨어지는 건 식물의 가장 기본적인 월동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읽었으면서도 더럭 무서워진다. 너 살아있는 거 맞지? 하고 물어보고 싶어질 만큼.


떨어지고 나서야 그 잎사귀가 그냥 평범한 잎사귀가 아니라 소위 수형이라고 하는 나무의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였음을 알 것 같다. 평소 다육이는 조그맣고 몽글몽글한 인상이고 무화과는 나름 쭉쭉빵빵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가장 큰 잎사귀가 떨어져 버린 무화과는 마치 어느 날 갑자기 길고 찰랑찰랑했던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타난 실연당한 여자 같은 모습이다. 나무의 가장 윗부분에 위풍당당하게 펼쳐져 있던 잎사귀가 사라지고 나니 무화과는 그냥 화분에 꽂혀 있는 막대기 하나 정도의 느낌이어서 지금 이 글을 쓰는 내내 창가에 있는 무화과를 흘끔거리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중이다. 떨어진 이파리를 다시 붙여 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떨어진 잎은 크기가 정말 컸다. 내 손이 그리 큰 편은 아니긴 하지만 내 손보다 손마디 하나 정도 겨우 작은 정도였다. 30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몸에 끝까지 매달고 있기에는 너무 큰 잎사귀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쯤에서 그 잎사귀를 놓아버리기로 한 녀석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마침 오늘은 무화과에 물을 주는 날이기도 하니, 이따가 늦은 아침이 되면 물이나 담뿍 주어야겠다. 추운 날에, 너 참 고생한다. 그런 말이라도 한마디 해줘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나 또한, 차마 버릴 수 없어서 주렁주렁 매단 그의 기억들을 어떻게든 놓지 않고 살아가려고 갖은 미련을 다 떨고 있는 비슷한 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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