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보일러를 꺼야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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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11월 말 정도가 되면 그는 보일러를 틀었다. 물론 그전부터도 날이 춥거나 씻을 때 온수를 써야 한다거나 하면 보일러를 틀지만 이 보일러를 튼다는 것은 그냥 상시로 계속 켜 놓는다는 의미다. 대신에 온도는 낮게 맞춘다. 에어컨이나 보일러나 원하는 온도로 온도를 내리거나 올리는 데 가스비 혹은 전기료를 다 잡아먹기 때문에 적정 온도에 맞춰놓고 계속 틀어놓는 게 오히려 요금이 적게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글쎄, 그러려나. 나는 못내 반신반의했지만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덕분인지 우리 집의 전기요금과 가스 요금은 물론 봄가을만큼은 아니지만 적정한 수준을 그럭저럭 잘 유지하는 편이었다.


이번 겨울도 그런 식이었다. 혼자 있는 집에 무슨 보일러냐고, 아주 추울 때나 가끔 틀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몇 달 전 에어컨 문제도 그런 식이지 않았던지. 혼자 있는 집에 무슨 에어컨이냐, 그냥 선풍기로 적당히 때워야지 하고 버티다가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에어컨을 틀었었다. 그냥 이럴 거면 어느 동네 수절 과부 같은 공수표나 떼지 말던가, 이게 다 무슨 일이라니 하는 넋두리를 그의 사진 앞에 대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으로 날짜는 3월로 넘어왔다. 물론 아직도 갑작스러운 추위가 한두 번쯤은 남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날씨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당장 이번주만 해도 낮에는 온도가 12도 정도까지도 올라간다는 모양이지만 조만간 한 번 패딩을 꺼내 입지 않고는 집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날 만큼의 추위가 한두 번은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꽃샘추위가 남았다고 해서 3월을 겨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3월은 어디까지나 이른 봄 혹은 초봄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슬슬, 겨우내 고생한 보일러에게도 소집 해제를 명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은 을씨년스러운 창밖너머 길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따라 심긴 가로수들도 조만간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겠지. 잘 돌봐주지도 못한 우리 집 무화과조차도 얼마 전에 새 잎을 틔웠으니까.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혹은 쓰지 않아도 시간은 가고 세월은 간다. 그러고 보니 지난 10개월 여를 보내면서 배운 가장 절절한 사실은 결국 그거였지 싶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는 것. 사람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데. 그게 좋은 거든 아니든 간에.


봄이 그래도 벌써 저만치 왔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어서 안타깝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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