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마트에는 단추 수프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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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프린팅박스라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쓴다는 '신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진을 '출력'할 수 있는 자판기인데 신기한 점은 이걸 '등록'해 놓고 코드 번호만 알고 있으면 굳이 usb 따위를 따로 챙겨가지 않아도, 심지어는 내 사진이 아니어도 그 자리에서 몇 장이고 뽑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뽑아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싶은 예쁜 그림의 코드를 공유해 주신 분이 계셔서 이 참에 이 걸 한 장 뽑아다가 모니터 옆에 붙여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때마침 어제의 점심 메뉴는 된장찌개인데 집에 두부가 없어서 나가는 김에 마트에 들러서 두부도 한 모 사 오기로 했다. 내 예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마트에 들어서서 이것저것 둘러보기 시작하는 순간 내 예상은 급속도로 박살 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두부는 원래 사기로 했으니 사야겠고. 집에 물티슈가 없고. 그러고 보니 계란도 한 알 밖에 없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게맛살이랑 비엔나도 좀 사가야겠고. 저녁에 마실 커피도 한 두어 병 사고. 편의점에서 사는 것보다는 마트에서 사는 게 쌀 테니까. 그렇게 어영부영하는 사이 손에 쥔 장바구니가 반 정도 그득하게 찼다. 아니, 두부 한 모만 사신다면서요, 사모님. 나는 정신줄을 놓고 몇 만 원을 쓰기 전에 서둘러 계산대로 가서 물건을 계산했다. 나온 금액이 만 8천 원가량 되었다. 정작 원래 사려고 했던 두부 한 모는 마침 싸게 나온 상품이 있어서 천 원도 채 주지 않았다.


어릴 때 읽은 동화 중에 단추로 수프를 끓이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나그네가 여행길에 한 마을에 들렀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인색해서 아무도 그 나그네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나그네는 내가 맹물에 단추 하나만 넣고도 수프를 만들 수가 있다는 말로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나그네는 정말로 맹물 하나에 단추 하나를 넣고 끓이면서 그런데 소금을 조금 넣으면 더 맛있어져요 버터를 한 숟가락 넣으면 더 맛있어질 텐데 고기를 한 줌 정도 넣으면 더 맛있어지지 않을까요? 하는 식으로 야금야금 원래 수프에 넣는 재료들을 다 넣고 끓여서 나중에 정작 단추는 건져내 버리고 진짜 수프를 만들어 온 마을 사람들과 그 수프를 나눠 먹는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내겐 아주 오랫동안 '시작은 대수롭지 않았으나 하는 김에 ** 한다는 식으로 자꾸 덧붙여져서 나중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일을 가리키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그런 단추 수프를 한 냄비씩 사서 들고 나오는 느낌이고. 어제도 그랬듯이.


계획 안 세우고 대충 살면 그렇게 되는 거라고 그라면 아마 그렇게 말하겠지. 그런데 뭐, 매번 장 볼 때마다 다음 장 볼 때까지 죽어도 사야 할 뭔가가 안 생길 만큼 꼼꼼하게 계획 세우는 건 뭐 아무나 하는 거냐고. 당장 어제만 해도 집에 와서 찌개를 끓이고 나니 된장이 똑 떨어져서 아 이왕 이것저것 살 거 된장도 사 왔어야 했는데 하고 장탄식을 했는데. 난 아무래도, 당신 같을 수가 없나 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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