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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왼쪽 이마 부근에 새치가 두어 가닥 나기 시작했다. 그걸 처음 발견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걸 계속 쳐다본다고 새치가 알아서 빠질 리도 없고 도로 검어질 리는 더더욱 없는데도 나는 오며 가며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해. 흰머리 났어. 나 늙었나 봐. 그 말에 그는 그야말로 한참을 박장대소를 하더니 그게 무슨 흰머리냐 새치지 하고 한 마디 했다. 새치랑 흰머리가 뭐가 다른데. 결국은 같은 거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그는 똑같은 말만을 한 번 더 반복할 뿐 더 이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도 세월이 한참이나 더 지난 지금은, 가끔 이런저런 일로 심란한 날 머리를 풀고 머리터럭을 더듬다 보면 제법 몇 가닥이나 되는 흰머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젠 뭐, 정말로 새치가 아니라 흰머리라고 불러야 되지 않을까. 새치와 흰머리는 그냥 말만 다를 뿐 의학적인 원인은 완전히 동일하다고 하는데, 그런 것까지 가져다 대지 않아도.
그에게도 새치인지 흰머린지 모를 것이 몇 가닥 났었다. 머리 벗겨지는 거랑 흰머리는 유전이라고, 그런 거라면 나는 어지간해서는 머리도 안 벗겨질 거고 흰머리도 잘 안 날 거라고 하더니 그게 백 퍼센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나이 먹나 보다며 낙심하지도 않았다. 역시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게 꼭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그도 속상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세 살이나 차이 나는 내 앞에서 흰머리 한 가닥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던 게 아닐까.
가만히 보면 흰머리는 나는 자리에서만 계속 난다.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흰머리라는 것 자체가 모발로 가는 색소가 생성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일 테니까 그 모낭 부근에 뭔가 기능저하가 있다는 말이 되겠고 그런 거라면 난 자리에 계속 흰머리가 나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겠지 싶다. 어릴 땐 흰머리는 한 번 뽑으면 그 자리에서 두 가닥이 난다나 하는 말을 듣고 백 원짜리 동전 몇 개에 눈이 어두워 엄마의 흰머리를 뽑아주는 일 같은 건 이젠 하지 말아야 되나를 고민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건 지금 생각하면 딱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아직은 염색씩이나 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냥 드문드문, 왼쪽 이마 부근에 예전엔 한두 가닥 나 있던 것이 몇 가닥 더 늘어난 정도다. 그래도 이젠 새치가 아니라 흰머리라고 불러야 옳겠지. 언젠가 이 머리칼들에 잔뜩 서리가 내리는 날이 오면, 혹시 그가 날 못 알아보지는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잠시 한다. 물론 그래도 그는 웃으며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게 무슨 흰머리냐, 새치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