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이렇게나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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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나는 그의 MBTI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을 보고 ESTJ가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어디서 들으니 MBTI를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유형이 ESTJ라던데 그런 거라면 확실하다) 만약에 정말로 그런 거라면 INFP인 나와는 거의 대척점에 있는 셈인데, 실제로 그와 나의 성격은 거의 정반대에 가까웠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닮아간 취향과 가치관 같은 것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비슷했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아닌 게 아니라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쓴 물건을 꼭꼭 제자리에 두는 사람이었다. 물건의 자리를 정해놓고 쓰고 나서 제자리에 두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정리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반면에 나는 '일단 어디든 던져놓으면 그게 제자리'인 타입이었고 그러다가 도저히 눈뜨고 못 볼 정도가 되면 마지못해 시간을 내 책상이나 책장을 정리하곤 했다. 그는 일정을 짜서 그 일정을 지키는 것을 좋아했고 일정을 짜고 고치고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일정이라는 거 짜봐야 매번 어그러지기 십상인데 왜 굳이 시간을 내 가며 그런 걸 짜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다.


그는 '예쁜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선풍기라든가 오븐이라든가 모니터 같은 것이 필요해서 이번 참에 하나 사자는 데까지 합의를 보고 나면 그가 골라 오는 것들은 대개 '예쁜' 것들이었다. 반면에 나는 물건이란 자고로 오래 봐도 안 질리고 막 써도 안 부서지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골라오는 것들은 대개 그 카테고리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무난하고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들이었다. 그래서 최종 후보 서너 개를 놓고 그와 나는 번번이 그건 이러저러한 점에서 실용적이지 못하다 혹은 그건 디자인이 너무 형편없다 같은 말로 입씨름을 벌이곤 했다.


그는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은 커피믹스가 몇 개인지, 냉장고 속의 계란이 몇 개인지, 남아있는 요거트들의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인지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기억력 하나는 꽤 좋은 편이었지만 나는 내 기억력을 그런 것들을 기억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내 기억력은 주로 저 배우가 예전 어느 드라마에 무슨 역으로 나왔었는지, 미야베 미유키의 그 많고 많은 책들 중 '벚꽃, 다시 벚꽃'은 정확히 어떤 이야기였는지, 우리가 제일 맛있게 먹은 파닭은 어느 브랜드의 치킨이었는지 하는 것들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서로에게 그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하냐고 놀라기도 했고 어떻게 그런 걸 기억 못 하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그를 추억하는 글을 쓰면서, 나는 가끔 그가 나와는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었던 것을 가끔 잊는다. 분명 그가 나를 화나게 한 일도 있었고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을 벌인 적도 있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며칠 동안 넓지도 않은 집에 살면서 말 한마디 안 하고 보낸 날도 있었고 살 맞대고 같이 산 지가 몇 년인데 왜 이런 것도 이해해주지 못하는지 서운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집에 있던 선풍기를 한 10년쯤 썼더니 리모컨도 고장 나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너무 시끄러워져 올여름쯤에는 선풍기를 하나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도 없는데 굳이 선풍기를 사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나는 그야말로 내 식대로 값싸고 무난한 디자인에 혹시나 고장 나면 AS 받기 편할 것 같은 선풍기 하나를 골라 결제했다. 그가 곁에 있었더라면 절대로 사지 않았을 물건이었다.


그러게, 같은 돈 주고 이런 재미없는 거 사는 게 싫었으면 그렇게 도망가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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