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껴놔 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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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척도 중의 하나는 '개선'도 아닌 '현상유지'를 위해 발라야 하는 화장품의 가짓수가 점점 늘어나는 점에도 있을 것이다. 예전엔 스킨 로션 하나 정도면 사시사철 불편한 줄을 몰랐고 그나마 여름에는 번들거리는 게 싫다며 스킨 하나만 바르고 로션은 바르지 않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어느 나라 이야기인지 싶다. 그래서 쓰는 화장품들이 슬슬 용기의 절반 아래로 내려가면 아, 이제 또 새 화장품을 사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그러던 중에, 이번에는 요행히 평소에 잘 사서 바르던 화장품 브랜드에서 스킨 로션 에센스에 크림까지 세트로 제법 싸게 나온 톡딜이 있어서 지금 쓰고 있는 화장품이 좀 많이 남아있는데도 이성을 잃고 사 버렸다. '사놓으면 언제 써도 쓴다'는 전가의 보도 같은 핑계를 대고서. 그렇게 택배로 받은 화장품 세트에는 1회분씩 소포장된 에센스 샘플이 열 개나 들어있었다. 예전엔 화장품을 사면 조그만 유리병에 담긴 샘플을 한 줌씩 주곤 했고 화장품 가게 사장님과 좀 친분이 있으면 그 샘플만 가지고도 본품만큼 쓸 수 있을 만큼 잔뜩 받아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던 '동네 화장품 가게'가 다 없어져 버린 후로, 화장품 샘플은 이런 식으로 바뀌어 오고 있다.


예전엔 화장품 샘플이 생기면 절대로 쓰지 않고 모아두는 편이었다. 여행 갈 때나 며칠간 집 떠나 있을 때, 큰 본품 병을 들고 가기 곤란할 때 쓰면 딱 좋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흔하지 않은 나의 이런 '뒷손'은 우리가 여행을 다니면 얼마나 자주 다닌다고 그러냐고, 아끼다 날짜 지나 버리기 전에 그냥 그것부터 쓰는 게 나을 거라는 그의 말 앞에 번번이 빈정이 상하곤 했다. 그리고 더 빈정이 상하는 것은, 결국 그의 예언 아닌 예언대로 나는 대개 그렇게 모아놓은 화장품 샘플들을 한 번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죄다 날짜를 넘겨 그냥 버리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게, 아끼면 뭐 되니까 제때제때 쓰랬지. 가끔 화장대 서랍 안을 굴러다니는 날짜 지낸 화장품 샘플들을 꾸역꾸역 찾아내 버리는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몰래 눈을 흘겼던 많은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내게는, 그런 다정한 잔소리를 해줄 사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생긴 이 에센스 샘플은 일주일에 두 번씩, 헤어팩을 하는 날마다 하나씩 까서 쓰려고 한다. 총 열 개를 받았으니 한 달 조금 넘게 쓰면 다 쓰겠고, 그러면 한번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날짜를 넘겨 버리는 일 같은 건 없게 되겠지. 시간은 흘렀고, 나도 나이를 먹었고, 그가 내 옆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잔소리하고 챙겨주던 그때보다 뭐라도 조금은 나아져야 되지 않겠는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도 하나쯤은 남겨놔 볼까. 이러다가 어느 날 허파에 바람이 들어서 그와 함께 떠났던 어딘가로 훌쩍 여행이라도 갈지도 모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지금은 그냥, 괜히 뒷일 생각하는 척하다가 날짜 넘겨 버리는 일이나 면하기로. 이제 조금은 철이 들어야지. 그냥,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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