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거면 그냥 라면을 먹지

-90

by 문득

슬슬 장을 봐야 할 타이밍이 돌아오고 있다. 그렇긴 한데, 이번 타이밍에는 뭔가 이리저리 걸리는 것이 많아 일주일 정도 날짜가 지연될 예정이고 그에 따라 뭘 새로 사기보다는 냉장고에 조금씩 남아있는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돌려막기 하며 끼니를 때우는 이른바 '냉파'('냉장고 파먹기'의 줄임말이라고 한다)로 이번주를 나야 할 것 같다.


이럴 때 유용한 식재료라면 단연 참치캔이나 스팸, 요리용 사골국물 등의 보관이 불편하지 않고 날짜에도 어지간하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제품들이다. 특히나 요리용 사골국물은 냉장고 속에 쓰고 남겨놓은 냉동 만두만 좀 있어도 국물에 만두만 넣고 10분가량만 끓이면 만둣국이 되니 그걸로 훌륭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어제도 그냥 괜한 골머리를 썩이지 말고 설날 떡만둣국을 끓여 먹고 반 봉지 가량 남은 만두가 있으니 그걸로 만둣국이나 끓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만둣국을 끓여야 될 타이밍이 오자 내 입맛은 엇박을 타기 시작했다. 아, 그 뻔히 아는 맛. 좀 다른 뭔가가 없을까. 다른 맛을 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걸 해 먹으면 된다. 그러나 이 나른한 주말에 나 혼자 먹겠다고 뭔가를 이것저것 하기도 귀찮았고 냉장고 속에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양파며 파를 푹푹 써버리는 것도 어쩐지 뒤가 켕겼다. 그에게서 배운 바, 이럴 때 만만한 것은 그저 라면 스프다. 그래서 나는 사골국물에 면을 사리로 쓰고 모아놓은 건더기 스프 하나와 국물 스프 반 개를 풀고 냉동만두를 넣어 끓였다. 그러니까, 이건 뭐 라면 맛 만둣국이라고나 해야 될지, 그런 음식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 이색적인(?) 만둣국으로 점심 한 끼를 무사히 때웠다.


다만, 그렇다. 그는 라면스프를 이런 게으른 방식으로 쓰지 않았고, 국물 요리를 하다가 마지막에 뭔가 살짝 간을 내고 싶을 때나 아주 조금만 썼었다. 그래서 그냥 만둣국이 먹기가 물린다는 이유로 라면스프 반 봉지를 생으로 넣어버리는 꼴을 보고 있었다면 아마 기겁을 했을 것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라면에 냉동 만두를 몇 개 넣어서 먹으라고, 그 편이 훨씬 덜 귀찮지 않으냐고 그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아니고, 그만큼 부지런하지도 애살 있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런 식으로 라면 스프를 반 봉지나 푼 사골국물에 만두를 넣어서 끓인 라면 맛 만둣국으로 대충 만족하고 만다. 이래놓고 오늘 점심에는 남은 찬 밥을 말아먹기 위해 또 라면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래 가지고서야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면 혼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뒤통수가 따갑긴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 입엔, 이젠 그냥 뭘 먹어도 그렇게까지 맛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대충 사느냐고 그가 나를 야단친다면 나도 뭐 할 말은 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image_4846655831488889143402.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부럼 대신 아몬드 빼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