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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큰 잔병치레를 하지 않던 것과는 별개로, 그는 살성이 약해서 잊을만하면 한 번씩 종기가 나서 고생을 하곤 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그는 요즘 누가 그런 걸 지키기나 하는가 싶은, 대보름날 아침에 딱딱한 것을 오도독 소리가 나게 깨물어 먹으면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는 부럼이며 잡곡밥이며 귀밝이술 같은 것을 잊지 않고 꼭꼭 챙겼다. 특히나 부럼의 경우는, 어차피 견과류는 사람 몸에 좋은 거고 이 핑계를 대고 먹는 거라고 그는 말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부스럼으로 고생한 자신의 경험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내알은 아침부터 합법적으로 술 마셔도 되는 날이라고 가끔 가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있어서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고 읽어봤더니 귀밝이술 이야기였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 벌써 대보름이고, 그 말인 즉 음력으로 해가 바뀌고도 2주가 지났다는 말이 되기도 해서 나는 시간 참 잘 간다 하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했다. 귀밝이술이고 잡곡밥이고 부럼이고, 이제 나 혼자 그런 걸 챙겨 뭐 하나 하고, 그렇게 지나가는 듯 했다가.
나는 결국 어제 오후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집 근처 마트에 가서 아몬드 빼빼로 한 통을 사 왔다.
누가 부럼을 빼빼로 같은 걸로 하냐고, 이왕 사 먹을 거면 하다 못해 커피 땅콩 같은 거라도 먹든지 하고 그는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 어차피 귀밝이술도 잡곡밥도 없는 대보름에 인사치레 정도나 하자고 산 물건이니 그게 커피 땅콩이든 아몬드 빼빼로든 뭐가 다르겠나 하는 자기 합리화를 해 본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른 빼빼로 말고 그나마 '견과류'가 박힌 아몬드 빼빼로로 산 것이 내 마지막 양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그는 대보름날 아침마다 잊지 않고 내게 더위를 팔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는 슬그머니 그러지 않기에 올해는 더위 안 파느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안 그래도 짜증 많아서 여름 되면 더워 죽는 사람한테 내 더위까지 팔아서야 되겠냐고. 아이고 철드네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철이 들고 나서 몇 년 안 있어서 그런 식으로 훌쩍 내 곁을 떠나버렸지만.
이제 이 글을 발행해 놓고 나면 어제 마트에서 사 온 아몬드 빼빼로를 뜯어서 오도독 소리가 나게 씹는 것으로, 나만의 대보름 세레머니를 마칠 예정이다. 나는 그와는 달라서 종기는 그다지 잘 나지 않긴 하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턱에 뾰루지가 올라오긴 하는데 이것도 부스럼의 일종이라도 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뭐든,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기억들이 나를 붙들어준다. 비록 잡곡밥도 귀밝이술도 이제 더는 없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