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맛있는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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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언젠가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을 한 번 쓴 기억이 난다. 그 글을 읽고 눈치채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나는 몹시 입이 짧고, 특히나 채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나물 종류는, 저걸 도대체 무슨 맛에 먹는가 하고 내심 생각할 정도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배기는 일을 하면서 식습관까지도 이 모양이니, 정상 체중으로 살아간 날이 인생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나 스스로도 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나는 비빔밥만은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 아주 예전, 그와 서울에서 창업 비슷한 것을 해놓고 점심시간마다 오늘은 도대체 뭘 먹고 한 끼를 때울 것인가로 골머리를 썩일 때도 나는 오늘은 새싹 비빔밥 내일은 돌솥 비빔밥 그다음 날은 육회 비빔밥 하는 식으로 비빔밥을 곧잘 사 먹곤 했고 그런 나를 그는 몹시 신기해했다. 채소라면 거들떠도 안 보는 주제에 비빔밥은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거냐고. 그러게. 난 사실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집 근처 마트에 뭘 좀 사러 갔다가, 시간도 애매한데 그냥 밥 먹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트 2층에는 꽤 그럴듯한 한우구이 집이 있고, 점심시간 한정으로 육회 비빔밥과 갈비탕을 식사 메뉴로 팔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점심 메뉴들이 그렇듯이 이 집의 육회 비빔밥도 가격 대 성능비가 좋은 것으로 근방에서는 꽤 유명해서 언제 한 번 먹으러 가 보자고 그와도 몇 번을 이야기하다가 고스란히 영영 그럴 기회를 놓치고 말았었다.


좋아. 오늘 내가 가서 맛있게 먹고 리뷰 써준다. 그런 기분으로, 혼밥을 하러 갔다.


커다란 스텐 그릇에, 갖가지 나물과 육회가 얹어 나오는 썩 나쁘지 않은 육회 비빔밥이었다. 그런데 정작 육회보다도 같이 나온 나물들이 맛있어서 한 숟갈 떠먹을 때마다 놀라고 감탄했다. 특히나 고사리의 쌉싸래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어서, 새삼 이래서 이 사람이 고사리를 그렇게 좋아했구나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했다. 그렇게 정작 육회 비빔밥이라면서 먹은 밥의 나물 맛에 감탄하면서 나는 밥 한 그릇을 맛있게 잘 먹고 가게를 나왔다.


나이를 먹으면 입맛이 변한다. 이미 나는 어렸을 땐 입에도 못 대던 수정과를 요즘은 없어서 못 먹는 지경이 되었고 저런 걸 왜 돈 주고 사 먹나 싶던 비지찌개 같은 것이 요즘 은근히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나물 차례인 모양이다. 이왕 변할 입맛이라면 그가 있을 때나 좀 미리 변했더라면 그 핑계로 그도 좋아하던 고사리나 실컷 먹었을 텐데. 뒷손이라고는 없는 마누라라 제사상 한 번 내 손으로 차려주지 못하고, 그래서 그 상에도 고사리나물 한 접시 올려주지 못하는 것이 영 마음이 좋지 않다. 따지고 보면 그가 내 입맛에 맞춰주느라 좋아하면서도 챙겨 먹지 못한 것이 고사리 하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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