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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사놓으면 평생 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 몇 가지 있다. 비근한 예로 식초가 그렇다. 자금 우리 집에 있는 식초는 3년쯤 전 추석 때였는지 김장철이었는지 집 근처 마트에서 행사 상품으로 천원도 채 안 하는 가격에 사 온 1.8리터들이 큰 병이다. 워낙에 양이 많아서 나는 그 식초를 거짓말 좀 보태서 내가 죽을 때까지는 계속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음식을 이것저것 다채롭게 하는 사람이어서 식초도 곧잘 여기저기에 썼다. 그러나 내 경우는 좀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이란 손에 꼽을 정도이며, 그중에서 식초씩이나 사용하는 음식은 더 몇 가지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양념들을 꺼내다가 식초병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저거 유통기한 안에 다 쓸 수는 있을까를 걱정했다. 정 안되면 마지막 얼마쯤은 그냥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고도.
그러나 식초의 용도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베이킹소다와 함께 쓰는 것이다. 베이킹소다 가루를 뿌려놓고 그 위로 식초를 부으면 거품이 일어나고, 나중엔 식초가 베이킹 소다를 흡수해 꾸덕꾸덕하게 굳는다. 그 상태로 뭔가를 닦으면 어지간한 묵은 때나 얼룩은 곧잘 진다. 나는 그런 식으로 원래 음식하는 데 써야 마땅할 식초를 싱크대 닦는 데도 썼고 가습기 청소하는 데도 썼다. 그러느라 한참이나 남아있던 식초는 푹푹 줄어 갔다.
며칠 전부터 욕실 세면대의 물 내려가는 속도가 영 시원치 않아서,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은근히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세면대 아래 배관을 들어내서 뭐 어떻게 하면 가장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모양이지만 우리 집 욕실 세면대는 앞부분이 마감처리가 되어 있어서 별다른 기술 없이는 뜯어낼 수 없게 생겨 있다. 그래서 나는 또 만만한 베이킹 소다를 쓰기로 했다. 팝업을 들어내고 그 속에 베이킹 소다를 실컷 부어놓은 후 식초를 따라놓는 것이다. 그런데 들어간 베이킹 소다의 양이 좀 많았던지 생각보다 식초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부어놓은 베이킹 소다가 다 반응할 정도로 식초를 붓고 나니 자그마치 1.8리터나 되던 식초는 이제 박박 긁으면 한 두 숟갈 쓸 수 있으려나 싶을 만큼의 분량만 남았다.
아이고 조만간 식초 사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 식초도 그가 쓰던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식으로 그가 쓰던, 혹은 그와 함께 쓰던 물건들이 하나 둘 수명을 다해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는 생각도. 그럼 그깟 식초 한 병 사놓고 천년만년 쓸 줄 알았냐고 그는 그렇게 반문하겠지만 막상 당해본 입장은 또 그게 아니다. 당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이 하나하나 수명이 다해 내 곁을 떠나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당신은 죽어도 모르지 않느냐고, 달도 바뀐 참에 이번 주말쯤엔 봉안당에 가서 그렇게 징징거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난 그 식초, 진짜 천년만년 쓸 줄 알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