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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05. 2024

1:1의 자주색과 1:2의 청자색

-99

그가 갑자기 떠나간 지 한 달쯤 후, 아마 5월 5일쯤이라고 기억되는데, 나는 불쑥 펜글씨를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내 인생을 붙잡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펜글씨는 그러니까, 울렁거리는 마음도 다잡고 너무 텅텅 비어버린 하루도 채워 넣을 겸 해서 고육지책으로 시작한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서너 달을 제외하고 하루에 다섯 장씩, 꼬박꼬박 펜글씨를 쓰고 있다.


2년 전 펜글씨를 시작하면서 샀던 잉크가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야무지게 닥닥 긁어서 다 쓰지는 못했지만, 남은 잉크의 양이 너무 적어지자 컨버터로 잉크가 잘 빨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새 잉크를 꺼내게 되었다. 현재 내가 쓰고 있는 펜은 세 자루고, 따라서 잉크도 세 가지 색을 쓴다. 그중 용량이 좀 많은 블루블랙은 아직도 한참 더 쓸 수 있을 것 같고 같은 브랜드에서 산 자주색과 올리브색 잉크가 거의 바닥을 보여가는 중에 자주색 잉크가 먼저 떨어졌다. 미리 사 둔 잉크는 하나는 보라색, 하나는 갈색이다. 다 떨어진 잉크가 자주색이어서 보라색 잉크를 꺼냈다. 그리고 새로 잉크를 채운 펜으로 글자를 써 보고, 나는 자주색과 보라색이 같은 색이 아니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잠시 당황했다. 전에 썼던 자주색 잉크는 붉은색이 많이 섞여 있었다면 새로 산 보라색 잉크에는 푸른색이 많이 나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면 그렇다. 두 색이 같은 색깔이라면 굳이 부르는 이름이 두 가지일 필요가 없을 것이고 영어로 봐도 purple과 violet은 분명 다른 단어다. 인터넷을 좀 찾아본 바에 의하면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어서 만들 수 있는 색깔을 통칭해서 보라색이라고 하고, 그중에서 빨간색과 파란색의 비율이 동일하게 섞인 것은 자주색(purple)라고 하고  빨간색과 파란색의 비율이 1:2인 것을 청자색(violet)이라고 부른다는 모양이다. 즉 나의 경우는 전에 쓰던 잉크는 자주색, 새로 산 잉크는 청자색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나는 새 잉크를 펜에 넣고 실제로 그 색을 확인하기 전까지 막연하게 두 색이 같은 색깔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 산 보라색, 아니 그러니까 청자색 잉크는 원래 쓰던 자주색 잉크에 비해 좀 더 여리여리하고 청순한 느낌이 난다. 덕분에 메이커만 바뀐 비슷한 색깔을 또 1년 이상 쓰겠구나 생각했던 나는 뜻하지 않게 횡재한 기분으로 펜글씨를 쓰고 있다. 똑같이 빨간색과 파란색 두 가지를 섞어도 무엇을 얼마나 섞느냐에 따라 자주색이 되기도 하고 청자색이 되기도 하고, 그 두 색깔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필경 퍽이나 다르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은 좀 새삼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그가 떠나고 나 혼자 칠해나가야 할 남은 날들은, 그래서 1:1의 자주색일까 아니면 1:2의 청자색일까.내가 그와 함께 보낸 시간과 나 혼자 보낸 시간은 아직은 그 비율이 1:1이다. 그러니까, 내 삶은 아직은 자주색인 셈이다. 이제부터 점점 청자색으로 변해 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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