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여자들이 그렇듯 나 또한 허리까지 닿는 찰랑찰랑한 긴 생머리가 로망이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지금도 백 퍼센트 아니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요즘도 길거리에서든 텔레비전에서는 긴 머리를 탐스럽게 기른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감탄해 마지않는 눈으로 쳐다보곤 하니까 말이다.
그깟 머리 기르는 것쯤, 그냥 시간과 약간의 참을성만 있으면 되지 않나 싶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내 머리는 어깨에 닿을 정도까지는 정말 무서울 만큼 빠르게 자라다가 어깨 선을 넘고부터는 도시당체 길지를 않았다. 그런 주제에 저들끼리 엉키고 갈라지고 끊어지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제 성미를 못 이겨 다시 잘라버리기를 일평생 반복해 왔다. 그래서 그가 떠나가고도 한참이나 지난 어느 날 머리 좀 자르러 미용실에 갔다가 긴 생머리는 아무나 하는 건 줄 아느냐고, 손님 같은 게으른 분은 죽어도 못하는 게 그 머리라는 미용실 사장님의 일갈에 찍소리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지난겨울 한참 춥던 어떤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때마침 다래끼가 나서 고생하던 중에, 나는 눈 찜질 할 때 쓸 팩을 좀 살 요량으로 안과 근처 마트에 들렀다. 언제나 그렇듯 마트는 일단 들어가기는 쉬워도 사려던 물건만 골라 나오기는 절대로 쉽지 않은 곳이라, 그날도 나는 자주 못 오는 곳이니 온 김에 구경한다는 핑계로 마트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정가가 만 원이 훌쩍 넘는 헤어팩 제품을 반값에 파는 할인 행사를 하는 것을 보고 홀리듯이 하나 집어와 버렸다. 물론 사다 놓고도 내내 투덜거렸다. 나는 지금껏 트리트먼트나 헤어팩 제품을 사서 끝까지 다 써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값도 좋지만 이래서야 생돈 몇천 원을 그냥 갖다 버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참이었다.
너는 상당히 게으른데, 그렇지만 일단 하라고 시키는 일은 그래도 곧잘 하는 편이니 뭐든 습관을 들이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일요일을 '헤어팩 하는 날'로 정했다. 그래서 이거 뭐 효과가 있겠나 반신반의하면서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꼭꼭 샴푸 후에 헤어팩을 바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씻어내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의 말마따나 일단 '버릇'을 들이는 데 성공한 탓인지 아직까지는 순조롭다. 그리고 꼭 그만큼이나 놀라온 것은, 고작 서너 달 남짓 일주일에 두 번 팩을 했을 뿐인데도 머리가 놀라울 만큼 덜 엉킨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을 때면 엉킨 머리 때문에 두피가 당겨 몇 번이나 짜증을 내고 인상을 썼었는데 요즘은 전혀 그런 일 없이 빗이 술술 잘 내려가서 내심 신기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그러니 손님 같이 게으른 사람은 죽었다 깨도 전지현 머리 못 한다던 미용실 사장님의 말씀은 필요 이상으로 사실이었나 보다.
조금 더딘 것 같아도 뭐든지 시간을 들여서 꾸준하게 하는 것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다. 그도 아마, 내게 그런 말을 해주려고 했을 것이다.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 조금 미안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