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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24. 2024

기다림과 미련함의 중간 어디쯤

-179

이번에 온 작약은 총 다섯 송이다. 라넌큘러스 등 같이 온 꽃들을 전부 빼고도 그렇다. 그중 두 송이는 올 때부터 이미 봉오리가 좀 잡혀 있었고 세 송이는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내심 시간차를 투고 피어서 꽤 오래오래 꽃을 보겠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들떠 있었다. 이미 브런치에 한 번 쓴 이야기이지 싶다.


그러나 작약을 받은 날로부터 꼬박 일주일이 지났는데 꽃이 개화하는 속도가 영 더딘 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반쯤 핀 두 송이는 작년에 샀던 작약처럼 활짝 피기는커녕 피다가 만 정도에서 영 답보상태이고, 나머지 세 송이는 도무지 꽃이 필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어제 물을 갈아주면서 보니 만개하지도 못한 채 반쯤 핀 작약의 꽃잎 가장자리 부분이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걸 보고는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판매자분에게 문의글을 써서, 17일에 받은 작약이 일주일이 지났는데 두 송이는 반 정도 핀 상태에서 멎어있고 나머지 세 송이는 필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데 이게 원래 이런 것인지,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물었다. 답은 즉각 달렸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봉오리가 그대로 있는 거라면 수관이 막혔거나 유통 과정 중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으로 생각되니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도 내심 며칠만 더 기다리시면 필 겁니다 라든가 하는 답을 기대하고 있었던지라 내심 김이 팍 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꽤나 부산스레 준비했던 이번 작약 프로젝트는 여기서 어느 정도는 실패로 끝맺게 될 것 같다는 결론이다.


이럴 대면 또 도리없이 의기소침해진다. 내가 뭘 잘못해서 저 꽃들이 저렇게밖에 피지 못한 것일까. 다른 솜씨 좋고 수단 좋은 분에게 갔더라면 제 수명대로 다 살아서 피고 싶은 만큼 피고 갔을 꽃들이, 나 같은 손재주 없는 사람을 만나 가뜩이나 짧은 목숨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어제 하루 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판매자 분께서 사진을 확인하시고 환불을 하든 재배송을 하든 하겠다고 하셨는데 가능하다면 재배송을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드려놓았다. 나름 큰맘 먹고 산 작약이고, 이렇게 떠나보내기에는 못내 억울하다는 생각을 영 떨치기가 어려워서다.


그나마 내가 잘한 일이 있다면 어제라도 더 미련을 떨지 않고 판매자님에게 용기를 내서 물어본 일일 것이다. 뭔가를 진득하게 기다리는 것과 미련하게 방치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없어서 언제나 그 한 끗 차이를 맞추기가 어렵다. 그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픈 부분도 그중 하나다. 그날, 그 전날 내가 조금만 덜 깊이 잠들었더라면. 조금만 덜 미련했더라면, 그냥 늦잠이나 자는 줄 알고 그냥 두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훌쩍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내심 아직까지도 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삶의 모퉁이마다 그를 맞닥뜨리고 그때마다 먹먹해진다. 그러면서 살아간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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