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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02. 2024

냉동실이라는 타임캡슐

-188

장을 볼 타이밍을 재다 보면 뭔가가 좀 애매해서 한 며칠 정도 애매하게 뜨는 타이밍이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 뜨는 타이밍에 뭘 어떻게 해서 지혜롭게 끼니를 잘 때우는가 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람이 살림을 어느 만큼 잘하는가를 판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저께 천 원 남짓을 주고 순두부를 사 와서 순두부찌개를 끓였다. 여기까지는 뭐 대단히 좋은 생각이었다. 다만 그렇게 끓인 순두부찌개를 이틀 간격으로 무슨 숙제하듯이 냉큼 먹어치우는 건 어쩐지 내키지가 않아서, 어제는 대번에 밥 해 먹을 거리가 궁해진 참이었다. 이럴 때 찬스 비슷하게 남아있는 스팸이라도 하나 따서 구워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냉동실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려 작년 11월에 주문해 얼려두었던 닭갈비 한 팩을 찾아냈다. 아, 이거 먹어야겠다. 그냥, 어제 내 한 끼는 그렇게 스무스하게 결정되어 버렸다.


냉동실이라는 공간은 대단히 편리하다. 일단 여기에 들어간 식재료는 어지간해서 상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며, 만두라든가 돈가스 같은 싸고 만만한 식재료들을 듬뿍 사다 재 놓으면 로또 1등까진 아니라도 3등 정도는 맞은 것 같은 괜한 든든함과 포만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늘 골머리를 썩다가 마지막 한두 뿌리 정도는 그냥 버리게 되는 대파 또한 실은 사 오자마자 싹 씻어 채를 썰어서 냉동실에 처박아 두면 어지간해서는 상해서 버리는 일은 없다. 물론 그 특유의 향이 날아가버리는 게 싫어서 나는 좀체로 그러지 않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편리한 대가로, 그 속에 집어넣은 것들을 나는 참 쉽게도 잊어버린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우리 집의 그리 크지 않은 냉장고 냉동실 안에는 대패삼겹살이 한 봉지, 물만두가 반 팩, 떡국떡이 거의 한 봉지 그대로, 냉동 주먹밥이 몇 개, 아직도 다 못 먹은 지난여름에 사다 넣어놓은 콘 아이스크림이 두 개, 오늘 먹어치운 닭갈비가 한 팩, 그리고 언젠가 싼 맛에 사다가 절반은 제육볶음을 해 먹고 절반 남겨 놓은 뒷고기가 한 책 들어있었다. 물론 지금의 이 리스트는 브런치 같은 공간에 대놓고 쓰기 덜 민망한 것들에 한한다. 그 외의 각종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치자면 꽤 버라이어티한 목록이 그 속에 처박힌 채 나에게서 참 쉽고 편하게도 잊혀지고 있었다. 일단 그중에 닭갈비는 요행히 오늘 해치웠지만, 저 남은 것들은 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슬슬 머리가 아파오는 참이다.


뭐든지 남으면 일단 냉동실에 집어넣고 보는 나에게 그는 늘 말했다. 냉동실은 타임캡슐 같은 게 아니고, 그래서 그 안에 넣어둔다고 영원한 게 아니니 너무 오래 묵지 않도록 신경 써서 꺼내 먹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던 그조차도 가끔 냉동실 안에서 굴러다니던 뭔가를 발견하고 머쓱해할 때가 있었다. 그러니 뭐 나 같은 뒷손 없는 인간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타임캡슐은 파내서 열어보는 재미라도 있다지만 열면 골치만 아파지는 냉동실인 바에야, 더더욱.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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