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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05. 2024

작약도 운칠기삼

-191

장고 끝에 주문한 작약이 드디어 배송에 들어갔다는 메시지를 월요일 오후에 받았다. 우리 집 근처를 다니시는 택배기사님은 대개 점심시간 전후에 방문하시기 때문에 꽃이 와도 그때 오겠거니 생각하고 마음을 탁 놓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송조회를 해 봤다가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다시피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번 판매자님은 우체국 택배를 이용하시는 모양이고, 우체국 택배는 아침 일찍 우리 집 근처를 다녀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 아홉 시도 되기 전에 집 앞에 도착한 작약을 한 시간쯤 현관 문밖에 방치해 둔 셈이 되었다.


부랴부랴 박스를 뜯고 꽃대를 다듬어 일단 꽃병에 꽂았다. 그리고 물을 끓여서 꽃대 끝을 담그는 물올림을 했다. 이번에 온 작약은 상품 소개 페이지로는 일곱 대라고 하더니 여덟 대가 왔다. 핑크색과 연보라색 작약만 있던 지난번에 비해 이번에는 제법 색이 짙은 빨간 작약도 한 송이 있고 아예 색이 하얀 백작약도 있어서 색채가 훨씬 다양해 보였다. 제발, 니들은 수관 같은 거 막히지 말고 잘 피라고 빌다시피 부탁했다. 잘 좀 봐달라는 뜻에서 꽃병에 얼음도 몇 조각 넣었다.


오후에 잠시 나갔다 올 일이 있어서 외출했다 돌아오니 반쯤 벌어져 있던 작약들이 무서운 기세로 피기 시작해서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환호성을 질렀다. 활짝 벌어진 백작약은 마치 연꽃 같아 보이기도 해서 신비롭기까지 해 보였다. 그리고 지난번 피다 만 작약 때문에 알게 된 것인데 작약에서는 굉장히 달콤하고 짙은 향기가 난다. 피기 시작한 작약들 덕분에 그의 책상 근처는 가기만 해도 향수를 뿌린 듯한 향긋한 냄새가 가득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 다행히 이번 작약들은 피지도 못한 채 시들지는 않을 모양이다. 이제부터는 하루라도 더 오래 살도록, 매일 꽃병에 얼음도 넣어주고 꽃대도 좀 더 신경 써서 잘라줘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결국 지난번 작약들이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버린 건 내 잘못이라기보다는 배송돼 오는 과정에서 작약에 뭔가 문제가 생겼던 게 맞았던 모양이다. 그때와 똑같이 했는데도 오늘 온 작약들은 한나절만에 저렇게 탐스럽게 피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봐야 일이 디는 건 결국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한다. 꽃 한 송이를 사다가 꽃병에 꽂아 그 피는 것을 지켜보는 이 단순한 일에조차 운칠기삼이니 인생이 어찌 내 맘대로만 되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꽃병에 꽂은 작약이 피는 것보다는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일 것임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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