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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12. 2024

역시 밝은 게 좋습니다

-198

한 달쯤 전의 일이다. 집에 처박혀 있다가 집 앞 편의점 좀 가려고 털레털레 집을 나선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뜨억 하는 소리를 냈다. 분명 연식 좀 된 후줄근한 엘리베이터였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사방에서 귀티가 줄줄 흐르는 새 엘리베이터로 감쪽같이 변해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공사하는 것도 못 봤는데. 그러고 나서 자세히 살펴보니 바뀐 것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엘리베이터의 조명이었다. 원래는 천장 정가운데만 흰색 빛이 나는 전구가 하나 정도 달려 있었는데 엘리베이터의 네 귀퉁이마다 주광색 빛이 나는 전구를 하나씩 꽂아 총 네 개의 전구가 밝혀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관리실에서 손을 좀 본 모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엘리베이터는 몰라보게 '때깔'이 좋아져서 어느 고급진 호텔 엘리베이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집에서 입는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따위나 찍찍 끌고 올라타는 것이 죄스러울 만큼.


나와 엘리베이터의 낯가리기는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집에 있다가 나갈 때, 나가 있다가 집에 올 때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나는 내가 10년 이상을 타온 그 후줄근한 엘리베이터 대신 너무나 고급진 엘리베이터가 나타나는 것에 번번이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너무 밝아서 부담스럽다는 둥, 잠옷 바람으로는 쓰레기 버리러도 못 나가겠다는 둥, 내가 생각하기에도 구차한 투덜거림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마도 엘리베이터 내부가 지나치게 밝아져 버린 덕분에 얼굴에 생긴 주름살과 희끗희끗하게 올라오는 흰머리들이 그 벽에 너무 선명하게 비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고 내 투덜거림도 며칠 내로 잦아들었다. 요즘은 예전의 그 어두컴컴하던 엘리베이터가 어땠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구가 하나밖에 켜져 있지 않은 덕분에 그 하나뿐인 전구가 수명이 다해 가서 조도가 낮아지거나 급기야 깜빡거리기 시작하면 1층에서 집까지 올라오는 그 몇 분의 순간 동안 상상 속에서 온갖 호러 영화를 찍곤 하던 것도 이제는 옛 말이 되었다. 네 개나 되는 전구가 한날한시에 수명이 다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1층에 있는 우편함에 편지를 가지러 내려가다가 우리 동네를 담당하시는 택배 기사님과 마주쳤다. 날씨가 벌써 더워져서 큰일이라는 인사를 하다가, 기사님은 문득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엘리베이터 불 갈아놓으니까 아주 새것 같고 좋네요. 무슨 호텔 엘리베이터 같고. 별 것도 아니고 전구 몇 개 더 끼웠다고 엘리베이터가 아주 한 인물 시원하게 났다고, 그런 말씀을 하면서 한참 웃으셨다. 이런 거 보면 굳이 돈 들여서 인테리어 같은 거 할 필요 없는 게 아닌가 싶다는 말씀과 함께. 그러게. 단순히 불이 좀 밝아지는 걸로도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는 거라면 우리 집 전등도 몇 군데 좀 밝고 따뜻한 색깔이 나는 전구로 바꿔 끼워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집에까지 낯가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같이.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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