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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13. 2024

수국에 미련이 남아서

-199

작약은, 한동안 내게는 '지는 모습이 충격적인 꽃'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빨갛고 곱던 꽃잎에서 색이 빠져나가 하얗게 변하고, 그러던 꽃잎들이 일순간 우수수 떨어지며 지는 모습이 그랬다. 처형되기 전날 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던 마리 앙투아네트 생각도 나고 뭐 그랬었다. 그래서 이번에 작약을 사기 전에도 사실 그 마지막에 많이 망설여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작약이 다 그렇게 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번에 온 작약은 연보랏빛과 핑크색이 나는 작약 위주였고 짙은 자주색과 빨간색이 나는 작약도 두 송이 섞여 았었지만 그중 어떤 작약도 지난번처럼 꽃잎의 색깔이 바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요컨대 그런 작약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약도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대충 맞을 것 같다. 이번 작약들은 그냥 아주 평범하게, 꽃잎 끝부터 누렇게 말라 들어가다가 어느 날 아침 꽃병에 물을 갈아주려고 잠깐 꽃병 밖으로 꺼내는 순간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으로 내게 작별을 고했다. 작년의 작약에 비해서는 그래도 덜 충격적인 최후이긴 했다.


그렇게 한동안 염원을 하던 작약에 대한 묵은 한을 풀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수국이다.


이맘때가 되면 참 여기저기서 수국을 많이도 판다. 자잘한 꽃송이가 둥그렇게 뭉쳐 있는 모양이 불상의 머리 같다 해서 불두화佛頭花라고도 부르는 수국은, 일단 그 기세가 워낙에 탐스러워 꽃을 사러 가면 사든 안 사든 그 앞을 한 번은 얼쩡거려 보게 된다. 그래도 이제 꽃 돌보는 스킬이 아주 많이는 아니라도 아주 조금은 늘었는데, 물올림도 해주고 매일 얼음도 넣어주면 예전처럼 사온 지 사흘 만에 말려 죽이지는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솔깃하다가도 그때 수국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장미라든가 소국 같은 적당히 돌보기 쉬운 꽃들을 고르게 되곤 한다. 그래서 내게 수국은 마치 다른 건 다 해놓고 딱 하나 남겨놓은 방학숙제처럼 느껴지는 그런 점이 있다.


이렇게 들먹들먹하는 걸 보니 난 아마 조만간에 수국을 한 번 살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에도 고작 사나흘만에 시들어버린 수국을 보고 마음이 상해서 다시는 수국 같은 건 안 살 거라는 징징거리는 글을 브런치에 대고 쓰겠지. 여기까지를 다 예상하면서도 이미 주문해 놓은 다음 꽃이 시들 무렵엔 수국을 한 번 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래서 인간의 옥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운운하는 인터넷 유행어가 있는 모양이다. 끝이 뻔히 보이는데도 저도 모르게 그 길로 가고 마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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