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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27. 2024

아까운 밤이라

-213

며칠째 그럭저럭 버틸만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낮에는 물론 덥지만(특히 나갔다 오기라도 하면 더더욱)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 에어컨까지는 필요하지 않고 선풍기도 하루종일 켜지까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지낼만해서 아마도 본격적인 폭염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 숨 고르기를 하는 타이밍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선선한 날씨에 에어컨을 켜는 건 뭔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며칠 때 그냥 창문을 열어놓는 걸로 지내고 있다. 다만 해가 지고 밤이 오고 나면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환하게 불을 켜놓는 건 사방의 벌레들을 다 불러 모으기도 하겠고 어딘가 부담스럽기도 해서 집안의 불을 다 끄고 스탠드와 모니터만 켜 둔 상태인데 이건 이것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어서 쓸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창가에 내놓은 화분을 들여놓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을 밤이 꽤 늦고서야 깨닫고 화분을 들여놓으러 나갔다가 그만 그 자리에 발을 멈췄다. 저 쪽 앞 아파트 단지 너머로 달이 둥그렇게 떠올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떠난 이후로 오후 대여섯 시만 되면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듯 두 겹의 창문을 모두 닫고 블라인드까지 꼭꼭 내린 채로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창문 너머 이렇게 둥그렇게 달이 뜬 것을 본 것은 아마 일부러 달을 보러 창문을 열었던 올해 대보름 이후로는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발을 멈추고 약간 귀퉁이가 이지러진 채 둥실 떠 있는 달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아마 저쯤 어딘가에 있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보다는 좀 더 즐겁고 행복하고 걱정 없는 곳에서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었으려나 싶다가도, 아니 그래도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생떼를 혼자 써 본다. 실제로 그가 떠나간 후 내게는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길을 잡아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몇몇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먼저 가도 너 먹고살 거리는 다 장만해 놓고야 갈 거라고 늘 말했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먼저 떠나게 된 게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서. 그런 생각을 하느라 들여놓으러 간 화분을 챙기는 것도 잊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고개가 아프도록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잠깐의 선선한 며칠이 지나가고 나면 또 숨조차 쉬기 힘든 더위가 찾아오겠지. 가뜩이나 이런저런 머리 아픈 이벤트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이번 여름은 역시나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이제 함께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지지만 뭐 그리 오래야 걸리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여름 더위가 닥치기 직전의 이 짧고 선선한 초여름밤처럼.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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