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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28. 2024

시간이 약이다

-244

며칠 전 갑자기 들이닥친 비에 모니터 액정에 습기가 차버렸고, 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모니터를 분해해서 패널을 닦아내거나 헤어 드라이어로 멀려야 하는데 플라스틱 변형 등의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있으니 그냥 자연건조되기를 기다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두기로 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게으른 사람 중에 의외로 완벽주의자가 많다고 한다. 뭔가를 시작하면 끝도 없이 파고드는 성격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시작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는 그 말은 꽤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데가 있다. 나는 그렇게 깔끔하지도 꼼꼼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다지 느긋하지도 못한 성미여서 뭔가를 묵혀두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걸 세상에서 제일 못한다. 일전에 내 마음을 상하게 하고 결국은 시들어버린 수국들 또한 물에 담가놓고 진득하게 기다리지를 못하고 오며 가며 그저 안달이 나서 몇 번이나 좀 싱싱해졌는지 꽃을 집어 들고 한참을 쏘아보다가 다시 물에 담가놓곤 했었다. 그 수국이 결국은 살아나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것에는 그 탓도 조금은 있지 않았으려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자연건조될 때까지 그냥 기다려라'는 저 처방은 내게는 꽤 가혹하게 느껴지는 데가 있었다. 저 모니터가 그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고, 그래서 오른쪽 모서리에 진 습기 찬 자국이 조석으로 내 눈에 보였다면 나는 아마 제풀에 안달이 나서 모니터를 분해하겠다고 달려들었거나 어설프게 헤어 드라이어를 들고 설치다가 더 큰 고장을 냈거나 뭔가 사달을 냈으리라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모니터는 내 시야에서 1차적으로 벗어나 있었고,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아침저녁으로 그의 책상을 정리할 때가 아니면 그 습기 찬 자국이 아주 심하게 눈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며칠, 사는 것에 바빠 모니터에 찬 습기 일은 잠시 잊고 지냈다. 단 그날 이후로 나는 짧게나마 집 밖에 나갔다 올 일이 있으면 반드시 창문을 닫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오늘 아침에 살펴본 그의 모니터 오른쪽 구석은 예전과 다름없이 말짱해져 있었다. 모니터는 켜두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열이 발생하며, 그 열기에 어지간한 습기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알아서 마르니 침수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며칠 기다리는 게 가장 안전한 해결책이라던 고수님들의 말은 결국 옳았던 것이다.


가끔은 시간이 약일 때가 있다. 그리고 시간이 약인 문제는 대개 시간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괜히 씁쓸한 기분에 아직도 올림픽 중계방송을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나처럼. 이미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내게는 아직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모양이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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