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오픈뱅킹은 편리하다. 은행의 개별 앱을 사용할 때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계좌들의 상태를 한눈에 비교하기에도 좋고 대개의 경우 이체하는 과정이 은행 앱보다 간편하다. 그리고 요즘은 이런저런 쏠쏠하게 쓸모 있는 부가서비스도 많아서 더욱 그러한 편이다. 다만 이런 오픈뱅킹에 의존하다 보면 '본가'라 할 수 있는 은행 본 서비스에 인증이 만료돼 버린다든가 해서 이체 내역 등을 떠는 등의 정작 필요할 때 서비스를 사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간혹 발생하기도 한다.
어제 좀 그런 일이 있었다. 한 가지 더 번거로운 것은 작년 급작스레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하는 과정에서 바뀌어버린 연락처를 제때제때 갱신해 두지 않아 도저히 혼자서는 인증서 갱신을 할 수 없게 되어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고객센터에 통화를 해야만 했다. 은행 관련 일로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면 보통 본인 확인을 위해 계좌번호와 비밀 번호를 물어본다. 으레 쓰는 비밀번호가 있는데 그 비밀번호가 가끔 이러저러한 사유로 사용이 되지 않아 다른 번호로 등록해 달라고 하는 은행이 몇 군데 있어서 그때 사용하는 예비 비밀번호가 있다. 여기까지를 생각해 두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이만저만해서 용건을 대고 연락처 갱신을 하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본인 확인을 위해서 계좌번호를 말씀해 달라고 한다. 여기까진 예상해서 어렵지 않게 불러줬다. ARS를 연결할 테니 비밀번호를 눌러달라고 한다. 여기까지도 별 문제가 없었다. 본인 확인이 되셨고, 그럼 등록된 연락처를 변경하신다는 말씀이실까요? 그렇다고 했다. 본인 명의 핸드폰이 맞으실까요? 그렇다고 했다. 본인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니 핸드폰 통신사를 말씀해 주세요. 잘 대답했다. 인증 번호를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핸드폰 뒷자리 네 자리를 말씀해 주세요.
여기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못 들을 질문도 아니고 못 할 대답도 아니었는데, 순간 멍청이가 된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한참을 버벅거렸다. 아, 저기. 아 저 그게. 아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한참이나 주워섬긴 끝에, 그나마 네 자리만 달랑 대답이 나오지 않아 010부터 시작하는 숫자 열한 자리를 전부 다 불렀다. 아니 주민등록번호보다 자주 쓰는 이깟 핸드폰 번호가 왜 생각이 안 났지. 우여곡절 끝에 본인 인증 절차는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핸드폰으로는 고객정보가 잘 변경되었고 혹시나 본인이 변경한 게 아니시면 연락 달라는 친절한 문사 메시지가 도착했지만 내 기분은 내내 찝찝했다. 3.14159265로 시작되는 원주율이라도 외우라는 것도 아니고 그깟 핸드폰 번호 뒷자리 네 자리가 생각이 안 나서 그렇게 버벅거리다니. 나 정말 다 돼 가고 있나. 핸드폰 들고 앉아 카톡이랑 서핑만 할 것이 아니라 맞고라도 쳐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정말로 좀 처량해져 버리고 말았다.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상담원 분은 친절하게도 아니에요 그런 분 많으십니다 하고 웃으면서 대답해 주기는 하셨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