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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졌지만 추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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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나는 원래 꽃을 인터넷으로 사는 것에 대단히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배송 과정에 대한 불신'도 있었다. 택배 하시는 분들이 하루에 배달하는 물량이 얼마인데, 안에 든 것이 꽃이라고 그걸 딱히 소중하게 다루실 시간 및 여유가 날 거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쩌다 한 번 택배로 사 본 꽃의 배송 상태가 대단히 좋았고, 내가 뭘 모르고 대한민국의 물류 산업을 우습게 봤구나 하는 통절한 반성 후 요즘은 애용하고 있긴 하지만.


지인 중에는 나와 비슷한 의혹을 가진 분들이 더러 계신다. 그래서 택배로 꽃 사는 이야기를 하면 '그거 무사히 배송돼 오긴 하냐'고들 많이 물으신다. 그러면 나는 내가 더 열을 내어 우리나라 물류 산업은 정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내가 지난겨울부터 거의 열 달 남짓 꽃을 인터넷으로 사고 있지만 박스가 찌그러져 있었다든가 안에 든 꽃이 파손돼 있는 건 한 번도 못 봤다고 열변을 토하곤 한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에 이민 가서 느끼는 불편함 중에는 분명히 택배로 인한 것도 있으리라고, 세상 어디를 가도 이런 택배는 우리나라밖에는 없을 거라는 말도 함께.


얼마 전까지 그의 책상을 지키던 스프레이 장미들이 슬슬 수명을 다하고, 이제 추석 연휴 동안 꽂아놓을 꽃을 사야 할 타이밍이 되었다. 때마침 나온 유찰꽃 상품 하나를 주문하고 꽃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불쑥 그런 생각을 했다. 아차, 지금은 다른 때도 아닌 추석 대목인데 하루 만에 올까. 내 걱정과는 달리 꽃 택배는 무사히, 배송이 시작된 다음날인 어제 오후 3시경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다만 생전 처음 있던 일로 택배 박스가 심하게 찌그러져 있어서 깜짝 놀라기는 했다. 다행히 속에 든 꽃들이 파손되거나 하지는 않아서, 나는 일단 꽃들을 다듬어 얼음물을 넣은 꽃병에 꽂아서 그의 책상 위에 가져다 놓았다.


클레임을 걸자면 클레임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날도 아닌 추석 대목에, 일단 꽃이 파손되지 않았으니 이런 걸로 문제를 삼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몇 년 전 지인이 보내신 추석 선물이 밤 11시도 넘어서 배송됐던 일을. 그와 나는 한참이나 얼굴을 마주 보며 세상에 택배 기사분들 아직까지도 배달하시는구나 하고 혀를 내둘렀었다. 지금도 모르긴 해도 그런 기간 중에 있을 것이며, 그러니 내용물에 별 문제가 없었던 바에야 이런 일로 문제를 삼아서는 안 될 것 같다. 한 택배기사님의 눈물겨운 문자 답장 메시지가 오늘은 뉴스에까지 실렸다. 추석이란 한 해 농사지은 것들로 조상들께 감사드리고 가족들끼리 나눠먹는 그런 날이 아니던지. 오늘쯤은, 그냥 찌그러진 박스 한 번쯤 눈 질끈 감고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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